IMF 비보 속에서도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는 한가닥 희망을 비추어 준다. 이는 단순한 정권교체의 차원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보여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불패의 신화처럼 우뚝 서 왔던 거대여당이 야당으로, 만년야당이 여당으로 자리바꿈함으로써 과거 어느때 보다 양당 구도에 의한 안정된 정치발전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야당으로 변신, 양당구도의 맥을 잡아 가야할 한나라당의 최근 행태에 기대보다 실망과 우려가 앞선다. 대선후 두 달이 가깝도록 패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리더십의 공백과 정파간의 대립·갈등으로 공중분해의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보면 연민의 정보다 배반의 분노가 앞선다.
지도이념도, 위계질서도, 그리고 거대야당으로서의 단결된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다. IMF 관리체제라는 국가적 위기앞에서 변변한 정책대안은 고사하고 원내에서의 입법및 정책공조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행보는 정치무상의 현실을 극화시켜주고 있다. 이제 한나라당은 언론의 변변한 스포트라이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정당, 권력도 사람도 돈도 대선의 패배와 더불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쇠망과 쇠잔의 정당으로 투영되고 있다. 세상사의 매정함을 탓해야 할까? 아니다. 이는 한나라당이 역사의식, 민주주의 소명, 그리고 국민의 열망을 스스로 저버리려는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 안된다. 과거 민주공화당, 민정당, 그리고 민자당의 전철을 밟아서는 더더욱 안된다. 정권이 바뀌면 정당도 사라지는 과거 집권당의 구태를 그대로 답습한다면 국민의 지탄을 면할 수 없다. 한번의 패배로 그냥 주저앉고 만다면 결국 한나라당은 확고한 정강이나 노선도 없이, 그저 이합집산의 노리개가 되어 해체·분리되고마는 역사의 사생아에 불과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군소정당이 아니다. 대선때 1,000만 가까운 유권자의 지지를 얻은 당이다. 그 연유야 어찌됐든 이 숱한 유권자들이 이회창이란 후보 개인의 인기와 지도력 때문에 표를 던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념 정강 정책, 그리고 통치능력을 믿고 지지를 보낸 유권자도 다수 있다. 한나라당의 자폐적 정치행로는 이 1,000만 유권자들의 기대와 소망을 저버린 직무유기이며 배신행위라 규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중심제를 택하고 있지만 이는 균형과 견제라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해 본질적으로 제약받는다. 행정부 장악이 국정의 장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대선에서는 패했다 해도 한나라당은 여전히 국회에서 164석을 점유하고 있는 다수당이다. 따라서 다수당으로서의 위상을 재구축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가야 할 시대적 소명이 있다.
미국의 경우를 보라. 공화당 우위의 의회가 민주당 행정부를 주도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한나라당도 하루빨리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1,000만 유권자들의 지지에 상응하는 의회 다수당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정치는 시작과 끝이 부단히 반복되는 과정이다. 이번 대선에서의 패배는 집권당으로서의 끝이지만, 야당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한국의 정치발전을 도모하고 재집권을 이루기 위해서 한나라당은 당권을 둘러싼 분쟁을 빨리 매듭짓고 이념정당, 정책정당, 그리고 국민의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과거 한나라당은 집권당으로서의 프리미엄을 통하여 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해왔다. 이제 그 인재들을 창의적 정책대안의 제시와 새로운 야당상 확립에 적극 활용해야할 때가 왔다. 한나라당이 단합된 모습으로 새정부에 대해 건설적 견제와 균형을 가하고, IMF 국난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야당으로 거듭난다면, 5년후의 재집권을 보장받을 수도 있다.
거듭 강조컨대,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건전한 양당구조는 필수적이다. 견제와 균형, 그리고 합의의 정신에 바탕을 둔 건전한 야당없이 민주발전은 어렵다. 민주발전 없이는 우리나라의 참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올바른 야당이 있어야 정치가 바로설 수 있고, 바로 이런 연유에서 한나라당이 살아야 나라가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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