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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김종희 회장(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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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김종희 회장(한국의 추억)

입력
1998.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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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전기흐르듯 ‘활력의 동갑친구’/다이너마이트 별명 근대화 상징인물/따뜻한 인간미에 한미유대 의기투합/이리 역사고 헌신적 수습 큰 감명/아들 김승연 회장 가족 지금도 연락 수년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나는 인간관계를 강조하고 소중히 여기는 한국인들의 유교적 사고방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신의를 바탕으로 한 친구간의 구두 협정이 일류급 변호사나 공증인의 입회하에 작성된 공식 계약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회고록에서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 독특한 맛과 향기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 준 몇몇 한국 친구들을 소개한 바 있다. 한국에 대한 나의 기억속에 새겨진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 김종희 전 한국화약그룹 회장이다.

대한민국 초창기의 휼륭한 재계 지도자였던 그는 60년대말 나와 인연을 맺었다. 나는 한미 관계를 초지일관 긴밀하고도 우호적으로 유지·발전시키는데 헌신한 그와는 마음속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미 동맹과 양국간 교류협력의 중요성을 가슴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이것 말고도 나를 매료시킨 「다이너마이트 김」의 성격과 장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자제력과 통솔력도 뛰어났고 매사를 자신감있게 추진했다. 때문에 나는 그에게 『이봐요, 다이너마이트, 당신 몸에는 전기라도 흐르는 것 같아요. 우리가 문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사이 당신이 들어오면 우리는 직감적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단 말이에요』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는 공교롭게도 나보다 두세달 늦게 태어났다. 때문에 나는 한국의 미풍양속을 따라서 당당하게 내가 「형님」이라고 그에게 말해주곤 했다. 그는 리처드 G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과도 유별나게 가까운 사이였다. 우리 부부가 서울에 머물었던 73년 당시 우리집은 용산 미군 영내의 스틸웰 장군집과 길 하나 사이에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자주 함께 만났고,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서로의 우정도 더욱 깊어졌다.

 우리가 한국의 근대화 기적에 관해 토론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자동적으로 김종희 전 회장이 떠오르곤 한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중 하나인 한국화약그룹을 창업했다. 나는 김 전회장이 여러 면에서 몇몇 재벌 총수들과 함께 한국의 미래를 짊어졌던 한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한국의 재벌들은 카네기와 록펠러, JP 모건 등 19세기말 미국 대기업들과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산업화의 초창기에 미국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장래는 매우 밝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물론 6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게 사업을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했는데, 그는 이 방면에서도 성공했다. 두 사람은 조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미국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똑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강대국인 미국은 당시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다이너마이트 김을 영웅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일화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그는 지역사회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많은 한국인들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바로 다이너마이트를 운반하던 기차가 전북 이리역에서 폭발한 사고가 일어난 77년 11월의 얘기다. 당시 화약 호송인은 담배를 태우던 상태에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급기야 담배때문에 불이 붙어 기차는 박살났고 도시의 대부분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다이너마이트 김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는 적절한 피해보상과 이리시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사재도 아끼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엄격히 따지자면 이날 사고는 그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는 사실상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리시는 차츰 정상을 찾아갔다. 이후 이 일화는 그를 둘러싼 전설의 일부가 됐고, 한국 전역에서 회자됐다. 이처럼 다이너마이트 김은 한국민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지도자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단지 제스처만 취하고 그냥 넘어가는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이리역 참사를 다루는데 있어 다이너마이트 김이 취했던 태도는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는 회사를 권위주의적으로 운영한 면도 있었지만 능률적인 면에서는 단연 돋보였다. 일벌레였던 그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때로는 솔직담백한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성실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또 앞날을 내다보며 비범하게 장기계획을 구상했던 그의 뛰어난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 중동건설 사업에 참여했던 한화그룹의 자회사 태평양 건설을 둘러싼 일화가 대표적 예다. 이 회사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건설사업을 벌였는데 다이너마이트 김은 몇몇 문제점을 간파한 직후 철수를 단행했다. 이 덕분에 태평양 건설은 손실을 면할 수 있었지만 다른 재벌의 건설 회사들은 몇해동안 이 지역에서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김종희 전 회장에게서는 언제나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대화나 메모 등을 통해 이런 따뜻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상대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고충이나 이해관계를 포용해 주는 제스처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인간관계가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70년대 그의 사무실 또는 서울의 플라자 호텔에서 이 친구와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 기쁘다는 심정을 은근하게 표현했다.

그는 도심 한복판인 서울 시청 맞은 편에 자리한 플라자 호텔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었다. 이 호텔은 서울에서 초창기에 지어진 대표적 일류 호텔이었다. 물론 호화롭고 더 큰 규모의 호텔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과거의 빛은 잃게 됐지만 이 호텔은 내게는 여전히 특별한 상징성을 띠고 있다. 나는 이 호텔을 볼 때마다 근대화를 주도했던 한국재계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의 아내 세니도 다이너마이트 김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의 아내 「케이」(강태영) 씨는 마거릿 조 여사의 친구였는데 세니는 그녀와 다양한 행사를 통해 즐겁게 지냈다. 그의 아들 김승연씨는 선친의 위업을 본받아 한국화약그룹을 이끌고 있으며 아버지에 이어 「다이너마이트」로 불린다.

 나는 지금도 다이너마이트 김 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자녀들에게는 내가 「할아버지」뻘이 되는 셈이다.

 다이너마이트 김은 그러나 내가 주한 미 대사로 서울에 도착하기 불과 며칠전인 81년 7월23일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애석한 일이었던가! 고인의 가족과 친지들은 이듬해인 82년 7월23일 1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다. 나는 참석자들의 면면을 훑어보고는 내가 고인과 교류한 덕분에 얼마나 많은 한국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는 영광을 누렸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의 지도아래 다이너마이트 김이 이룩한 창조의 정수인 창의력과 열정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화그룹의 사업활동은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까지 뻗어가고 있다. 한화그룹 사옥은 또 서울에서도 눈길을 끄는 근사한 사옥중 하나다.

 나는 지금도 「다이너마이트 2세」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한국 여행길에 동행한 미국 친구들도 그와 친분을 맺게 됐다. 이런 관계는 양국간의 유대를 그처럼 생동감 넘치게 만들었던 핵심 요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가족간, 그리고 가족내의 긴밀한 유대관계였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이종수" 기자>

◎고 김 회장 1주기때 낭독한 추도사

 김종희 전회장의 유족과 친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신사 숙녀 귀빈 여러분.

 저는 고인을 추도하는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참석해 추념사를 낭독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올해, 주한 미 대사로서 저는 고인에 대해 몇 말씀드리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위대하고 변치않는 미국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행스럽게도 고인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각별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수교 100주년을 맞아 조지 부시 부통령과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포함한 수 많은 미국인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이땅에서 한국과 그 국민들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존경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45년 해방이후 산업화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교육과 사회복지,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놀랄만큼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한국민들이 해방이후 35년동안 보여준 창조력은 전세계의 인정을 받고 있으며 한국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년동안 「국가건설」이란 용어는 신생 독립국들이 근대화하는 과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대한민국처럼 이런 현상(국가건설)을 훌륭하게 보여준 사례는 없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국가건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도자들이 있어야하는 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자란 정치 지도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 정치분야의 뛰어난 「건축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미국에서는 카네기와 멜론, 밴더빌트, 포드, 록펠러 등이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생국 미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차대전 종전이후 한국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비전과 신념, 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기업가적 재능이 넘쳤습니다. 수백만 한국인들의 삶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편리해졌습니다. 한국민들이 이런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그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인은 바로 근대 한국을 일궈낸 거목중 한분입니다. 그분이 살았었기에 한국민들은 확대된 기회와 함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고 앞으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동양에는 『한 세대가 나무를 심으면, 다음 세대는 그늘을 얻는다』라는 오랜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인 덕택에 크나큰 그늘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나무며 훌륭한 그늘입니까?

 미국의 위대한 친구였던 그분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수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하려는 가치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정과 유대관계, 친구와 가족을 향한 정성, 교육과 기회에 대한 배려, 인간관계에서의 상호주의에 대한 믿음, 진정한 자유를 위한 신념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친구인 다이너마이트 김이 5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데 대해 그동안 진심으로 애통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죽음은 이제는 과거사가 됐습니다.

 한국의 시골 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는 행복하고 훌륭하게 차려입은 주민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천진난만하게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과 새롭게 단장된 농촌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슬픈 마음을 거두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던 사실에 대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중에는 김종희라는 이름의 거인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고인은 지금도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모든 한국민들이 행복하기를 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한국민들은 오늘날 행복합니다. 고인이 우리들과 이 땅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덕분에 더없이 풍요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1982년 7월23일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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