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한보부도 ‘12·3’ IMF국치/우연의 숫자,숙명의 인과/‘14위 재벌의 몰락’ 국제신용 금가는데/이석채 수석 “은행 도산해도 지원없다”/추락 ‘대외신인도 화약고’에 불질러/기아터지자 “한국주식회사 경영한계”/행동없는 ‘시장원리론’에 매달린 사이 동남아 금융태풍 한국호 강타 97년 10월23일 초특급태풍이 동남아로부터 빠른 속도로 북동진하고 있었다. 일명 「파이낸셜 크라이시스(Financial Crisis·금융위기)」호.
핫머니 공격으로 태국서 처음 발생한 이 태풍은 인도네시아를 거쳐 홍콩에 상륙했다. 800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던 홍콩주가를 단 하루새 1,212포인트(10.3%)나 폭락시킬 만큼 대단한 위력이었다. 대만도 휘청거렸다.
진로는 북동쪽이었다. 한국은 빠르게 태풍권으로 빨려들어갔다. 먼저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24일 환율은 사상 처음 달러당 930원을 돌파했고 주가는 600선이 붕괴됐다. 기업들은 달러사재기에 들어갔고 수백∼수만달러씩 달러를 사두려는 「개미군단」까지 환전창구에 등장했다.
밖의 상황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S&P는 24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떨어뜨렸다. 10여년이상 오르기만했던 국가신용도가 공식하락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디스도 나흘 뒤(28일) 한국의 단기채권등급을 한 단계 하향조정했다.
청와대재정경제원한국은행의 외환라인이 위기감을 감지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이경식 한은총재의 회고. 『연초부터 외환사정은 어려웠고 출렁거리다 진정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한보때가 그랬고 기아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기반이 튼튼한 홍콩과 대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사태가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은국제부가 이총재에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신청 검토보고서를 최초로 제출한 것도 24일이었다.
이로부터 한달후 한국은 IMF로 갔다. 10월23일 홍콩증시폭락부터 11월21일 IMF구제금융 신청발표까지 한국은 태풍속에 침몰하는 난파선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한국은 동남아와 다르다」는 정부의 말만 믿고 있던 온 국민들이 하루아침에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환율은 연일 상한가로 폭등했다. 한은 금고를 열어 외환보유고를 쏟아붓고 가격변동 폭을 풀어도 막무가내였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은행들이 곧 파산한다』『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는 악성보도가 미국의 월가를 중심으로 계속됐다.
시중은행 고위간부 J씨의 설명. 『10월말 홍콩사태가 터지고 난 뒤 「다음 차례는 한국」이란 소문이 퍼졌고 해외차입선들의 크레디트라인(대출한도)은 거의 동시에 끊어졌다. 만기연장과 신규차입을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확실히 홍콩증시폭락은 한국의 외환위기에 치명타였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멀쩡한 경제를 일순간에 붕괴시킬 수는 없다. 똑같이 위기상황을 맞았어도 홍콩과 대만은 결과적으로 무사했던 반면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은 무참히 쓰러졌다. 적어도 10월23일 현재 「한국호」는 「난파선」은 아니더라도 이미 만신창이의 「반파선」상태였다.
그렇다면 한국호에 고장이 발생한 때, 즉 외환위기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거슬러가면 끝이 없겠지만 그 잉태시점을 한보사태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도 『한보사태이후인 3월초 이미 외환불안은 감지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의 기산점 선정은 국가파탄 책임자를 가리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약 출발점을 한보사태로 규정한다면 당시 경제팀을 이끌던 한승수 전 경제부총리와 이석채 전 청와대경제수석도 책임을 면키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97년 1월23일 한보철강 최종부도. 같은해 12월3일 IMF 구제금융신청 서명. 1·23에서 12·3으로 끝나는 이 우연한 숫자는 한보와 IMF간에 숙명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연초 노동법파문으로 암운이 드리워진 한국경제에 14위 재벌 한보의 몰락, 특히 은행장과 전·현직 국회의원, 현직 대통령의 아들까지 구속시킨 이 정경유착사건은 한국의 대외신용도에 금을 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국제금융담당 은행간부 L씨의 회고. 『9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한국의 신용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의 금융기관이나 웬만한 기업이 해외에서 돈 꾸는데는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법파동에 이어 한보부도가 터지면서 국제금융계의 움직임은 심상치않게 돌아갔다. 그러나 치명타는 「이석채 쇼크」였다』
화약고에 불을 지른 것으로 비유되는 이석채 쇼크. 1월30일 이수석의 『은행이 도산해도 정부는 지원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국제금융계는 한국에 대한 불안감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면 원칙론적 얘기로 넘어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한보의 거액부실로 은행부도설이 나돌던 시점에 나온 경제정책 핵심의 발언은 『은행을 도산시키겠다』는 메시지로 굴절되어 번져나갔다. 일본계 금융기관들은 국내은행 현지점포의 크레디트라인를 전격 축소, 사실상 여신회수에 착수했다. 일본중앙은행은 31일 이례적으로 한국정부에 해외점포 결제대책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계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줄 때 높은 위험가산금리를 붙이는 「코리안 프리미엄」이란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외환사정은 3월말까지 악화일로였다. 해외차입이 어려워지면서 연초 달러당 844원이던 원화환율은 석달만에 900원대를 눈앞에 두게 됐다. 환율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소진하면서 수위는 연말 332억달러에서 3월말 291억달러로 격감했다. 정도차는 있을지언정 돌아가는 모습은 11월 IMF구제금융신청 직전과 유사한 것이었다.
외환경고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금융연구원은 3월말 한국에 금융위기 발생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논문을 냈다. 대통령자문기구인 금융개혁위원회도 4월초 전체회의에 같은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재경원의 반응은 묵살과 힐책이었다.
정부는 위기를 몰랐던 것일까. 재경원 K국장. 『우리도 심각성을 알았고 특히 3월엔 사실상 비상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와 학자는 다르다. 정부는 위기가 눈앞에 닥치더라도 결코 위기라고 말할수 없다』
다행히 외환상황은 3월말을 저점으로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한보이전으로의 회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 꼬집어 위기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그런 소강국면이 3개월이상 계속됐다.
한은 고위관계자의 회고. 『꺼져가던 외환위기의 불씨를 다시 지핀 것은 기아사태였다. 한보와 기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외국의 시각에서 한보사태는 일종의 「한국적 정치스캔들」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기아사태는 본질적으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됐다. 기아가 쓰러지자 외국인들은 「이제 한국주식회사는 경영능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재계 8위의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간 7월15일 이후 해외의 반응도 한보 때보다 훨씬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S&P는 23일 한보와 기아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 5개 은행을 신용감시대상으로 지정했다. 곧 이어 한국의 국가신용전망을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사실상 평가절하했다. 코리안 프리미엄 급등, 크레디트라인 축소, 만기연장률 급감, 환율상승은 예정된 시나리오처럼 이어졌다.
하지만 재앙은 기아의 몰락 자체보다 미숙한 처리에 있었다. 금융계 고위인사 L씨는 『기아사태의 장기화는 시장불안의 진원지였다. 가장 중요한 시기였지만 행동없이 「시장원리론」 「펀더멘털(기초여건)론」만 펴고 뒷북치는 대책만 내놓으면서 경제는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기아사태는 우여곡절끝에 발생 꼭 100일만인 10월22일 정부의 공기업화방침으로 일단 봉합되는 듯했다. 모두들 「이젠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다음날 메가톤급 외환위기태풍이 동남아에서 북상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보와 기아, 동남아사태는 한국호를 좌초시킨 결정적 암초들이다.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세 사건의 연결고리는 「한보에 입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기아 방치로 곪은 상처는 동남아사태로 터지고 만것」에 비유된다.
여건도 악재뿐이었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응도 악수뿐이었다는 점이다. 선장은 오래전부터 지휘능력과 의욕을 상실했다. 전권을 행사한 빅3(경제부총리 경제수석비서관 한은총재)인 항해사, 기관사, 조타수는 무책임하고 무능하게 잘못된 항로만을 골라 난파선을 이끌었다. 국가부도가 초읽기에 들어갔던 11월, 신기루 같은 금융개혁법안을 놓고 치고받던 이들의 모습이 이를 말해준다.
◎인재론… 원죄론… 실책론…/경상적자원죄론“고성장·적자방치가 원인”/OECD 실책론“자본 빗장풀어 외채폭발”
외환위기가 정부의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인재론」이 대두되는 요즘 청와대와 재경원, 한은등이 새로 개발한 방어논리는 「경상수지적자 원죄론」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실책론」이다.
경상수지적자 원죄론은 ▲외환위기는 외채증가 때문이고 ▲외채는 경상수지적자만큼 늘어나기 때문에 ▲외환위기의 근본원인은 폭발적인 경상수지적자확대에 있다는 삼단논법에 입각하고 있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취임 당시 외환보유고는 280억달러에 불과한 반면 전년(96년) 경상수지적자는 237억달러에 달해 외환위기 가능성을 짐작했다. 대책을 추진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이경식 한은총재도 『95년 고성장을 자제하지 못하고 경상수지적자를 방치한 것이 결정적 실책이었다』고 술회했다.
OECD 가입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자성의 소리도 높다. 선진국클럽 회원권을 따기 위해 준비도 없이 자본시장 문호를 열었다가 결국 외환위기의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재경원 간부 L씨는 『OECD 가입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금융기관 해외투자규제완화, 외국인주식투자개방, 단기차입제한철폐등 자본의 빗장을 한꺼번에 여는 바람에 외채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당시 정부내에서 반대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OECD가입은 「한건주의」의 전형적 표본이었다. 모든 것을 내주고서라도 임기에 꼭 선진국 자격증을 따겠다는 현 정부의 「치적욕심」에 시기상조라는 비판은 들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한국의 신용도는 급상승했지만 『그때 한국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국제신용평가기관 IBCA의 반성처럼 한국의 실력은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되었다. 때문에 허상이 드러난 후 곤두박질치는 폭과 충격은 그만큼 클수 밖에 없었다.
외환위기의 뿌리가 경상수지적자에 있고 OECD가입이 무리였다는 진단이 틀린 점은 없다. 그러나 지금 원죄론과 실책론의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1년전만해도 『이 정도 경상수지적자는 문제될 바 없다』『OECD 가입으로 선진국의 꿈이 실현됐다』고 역설했던 바로 그 당사자들이다.
□특별취재반
이상호 경제부 차장대우
정희경 경제부 기자
이성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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