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딜 가나, 어느 자리에서나 IMF화제가 빠지는 일이 없다. 국가파산지경의 고비는 넘겼다는 관측이 나오고는 있으나 다들 예측불허의 공포심리에 사로잡혀 있다. 대기업을 비롯한 기업체들의 부도·도산 속출에 따른 엄청난 실업자사태와 체임·정리해고 회오리등이 연일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달러 고갈과 환율급등으로 인한 산업경제의 심대한 타격과 모든 물가의 상승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파장이 사회 각계에 몰아치고 있다. 나의 생활분야인 미술계라고 무풍일 리 없다. 대기업의 미술관운영이나 시설공사가 대부분 정지되기 직전이거나 중단되면서 예정됐던 기획전들이 취소 내지 축소되고, 작품구입은 동결되는 실정이다. 잘 나가던 미술잡지 하나가 연초에 이미 정간되기도 했다. 기반이 탄탄한 것으로 알려진 유력화랑들도 위기탈출의 방책으로 운영구조를 대폭 축소하고 재고작품을 처분하기 위해 전시를 급조하는가 하면 전시장을 카페등으로 활용한다고 하는 말도 들린다. 그런 가운데 종래의 큰 고객 중에 형편 좋을 때 사둔 유명작가의 작품을 반값으로라도 다시 팔겠다고 내놓는 사례조차 있는 모양이다.
분위기와 사정이 이러하니 개인적으로 작금의 경제위기에 지장없는 부유층일지라도 예전처럼 화랑산책을 즐기거나 그림을 구입하기에는 남의 이목이 신경쓰일지 모른다.
그러니 작가들, 특히 전업작가들의 제작생활은 한동안 암담하게 돼버린 지경이다. 이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대책은 기대하기 어렵다. 있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구입예산을 값비싼 구미작품을 사오는데 쓰지않고 국내작가 작품의 구매에 쓰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미술가나 모든 예술가에게 경제적 수입이 전부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곤궁한 처지에서 오히려 예술창조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불후의 명작을 남긴 사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이 알고 있다. 한국전쟁시기와 그 직후의 참담했던 생활고 속에서 자신이 처했던 현실과 삶의 고난, 그리고 평화의 기도를 순수한 예술정신과 독특한 표현수법으로 펼쳐 감동적인 화면세계를 창조한 박수근 이중섭의 존재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뚜렷한 본보기이다.
그러한 심정적 리얼리즘은 오늘의 IMF 고통의 상황에서도 여러 형태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품전을 연내에 한번쯤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도 갖게 된다. 비사실·비구상의 현대주의 작가들로서도 이 경제대란을 극복하는 희망적 메시지를 상징적 표상으로, 또는 그 배경의 고발 등을 소재로 얼마든지 작품행위가 가능할 것이다.
미술이나 문화예술 전반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일반 국민이나 경제인, 기업인 등은 이 절망적 경제대란 상황에서 미술이니 그림이니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고 문제가 되느냐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경제실정이 어렵더라도 문화와 예술을 외면하고 경시한다면 결국 그 사회와 국가는 문화적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국제경쟁에서도 2류, 3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진 외국의 유명 메이커 상품이 그간 한국에서도 최고 인기를 누린 것은 그만큼 미술적 디자인이 세련되고 멋있으면서 품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미술과 산업경제의 관계는 그렇듯 모든 상품 종류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그 긴밀성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가야한다.
근래에 외국인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원화가치가 떨어진 상황에서 그들로서는 값싼 한국여행과 한국상품 구입이 얼마나 즐겁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긴요하게 생각해 볼 것중의 하나는 지금까지의 낙후하고 조잡하고 세련되지 못한 관광상품과 기념품들의 품질을 미술적 디자인으로서 높이는 일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적 양상은 근년에 이르러 국제미술계에서 크게 주목과 평가를 받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의 잇딴 수상등은 그 단면이다. 그것이 한국의 문화적, 예술적 이미지에 곧바로 작용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의 심각한 경제위기와 고난을 극복하는데 미술이 작은 기여나마 하기를 빌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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