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6일 캉드쉬 극비방한/강경식 한밤 호텔서 “SOS”/11월16일강 “지원필요” 캉드쉬 “최대한 지원”/17일꼬여가는 상황… 금개법만 매달려/18일강 부총리 각의서 “기초 튼튼”/19일신임 임 부총리 발표안해 미 “약속파기”/20일부총리·한은총재 등 IMF행 격론/21일밤 10시20분 ‘바보가 되어버린’ 국민들 바로 3개월전까지만해도 경제규모 세계 11위를 자랑하던 우리 경제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딴 나라 이야기만 같았던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이 「한강의 치욕」으로 바뀌면서 국민생활 전반이 크게 변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7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말한다. 어찌해서 이렇게 몰락했는가.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 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6·25전쟁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대환란의 과정을 10회에 걸친 대하 다큐멘터리를 통해 해부한다.<편집자주>편집자주>
『금융파국위기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며 지원을 호소해 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지난해 12월2일 태국 방콕 국제노조연맹총회장.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총재는 예상외로 단호했다. 『한국정부가 상황을 너무 오래 질질 끌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합의의향서 체결을 위한 「공식」 방한을 하루 앞둔 캉드쉬총재는 「베니스 상인」 그 자체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IMF 수석졸업생이다』고 추켜세우던 그였다. 왜 돌변했을까. 캉드쉬총재는 2주전인 11월16일 정부 요청에 따라 극비리에 한국을 찾았다. 그로부터 정부가 IMF행을 발표했던 21일까지, 급박했던 1주일을 돌아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1월16일 일요일인 탓인지 하오5시의 김포공항 2청사 입국장은 평소보다 붐볐다. 『걱정마십시오(Don`t Worry). 한국인들에게는 모든 외국인이 똑같아 보입니다』 재정경제원 김우석 국장과 최중경 과장은 남의 눈에 뜨일까 염려하는 캉드쉬총재와 휴버트 나이스 IMF아·태국장을 안심시켰다.
관용차 대신 렌터한 다이너스티를 타고 올림픽대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인터컨티넨탈 호텔 스위트룸. 하오 6시30분 강경식 경제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총재 재경원 엄낙용 2차관보(현 관세청장)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이 함께 들어왔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강부총리가 환율, 외채 만기연장률 등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가며 급박한 금융시장 동향을 설명했다. 『IMF의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9일께 공식 신청하게 될 겁니다』 시계가 벌써 밤10시를 넘고 있었다. 긴장된 침묵이 흐른뒤 캉드쉬총재가 굳은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그는 이튿날 아침 은밀히 워싱턴으로 떠났다.
강부총리는 IMF 지원요청을 대외신인도를 높이기 위한 「도우미」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18일 끝나는 국회에 제출한 금융개혁법안에 희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부총리의 회고. 『금융개혁법안이 통과되고 19일 발표되는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효과가 있으면 IMF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마지막 기대를 가졌다. 정치권이 너무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였다』
이날 아침 3당 총무들은 결론을 못내렸고,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노조협의회는 상오11시 기자회견을 통해 『한은법 및 감독기관통합법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11월17일 상황은 더욱 꼬여갔다. 상오11시 국회 재경위가 속개됐으나 무결론. 3당 총무와 만난 강부총리는 『금융개혁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나 야당은 회의에 불참했고 신한국당도 노동법파동을 의식, 단독처리하지 않겠다고 발을 뺐다. 밤 10시15분까지 하루종일 국회에 묶여있던 강부총리는 「예금자보호법등 4건 선별처리」에 만족해야 했다. 금융개혁법안은 사실상 무산됐다.
달러환율은 하오 2시10분 제한폭(1,008원60전)까지 치솟은뒤 거래가 중단됐다. 『재경원이 금융개혁법안을 담보로 실력행사를 벌인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사실은 외환보유고가 부족해 역부족이었다.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22.39포인트 빠져 500선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한은 직원 600여명은 낮 12시부터 2시간45분 동안 신한국당사 앞에서 금융개혁법안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벌였다.
·11월18일 상오 9시30분. 외환시장 개장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마자 환율은 하루변동제한폭인 달러당 1,012원80전까지 오른뒤 1분만에 거래가 중단됐다. 조금뒤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국무회의실. 막 자리를 뜨려는 장관들을 오인환 공보처장관이 붙들었다.
『지금은 일종의 국난상태다. 당면한 위기를 국무위원들도 알아야 한다. 외환위기가 심각한 것 같은데 강부총리 견해는 어떻소』
『우리 경제의 기초는 아직 튼튼한 편이다. 이번 위기는 심각하다. 금융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할 줄 알았는데… 너무 힘들다. 재벌들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간담회는 25분간 「침통」과 「한숨」으로 이어졌을 뿐 대처방안이나 합의는 없었다.
하오 8시. 국회 폐회로 금융개혁법안은 무산.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 강부총리는 금융정책실 국·과장들을 불러 모았다. 『거대한 그물에 걸린 것 같다』 침묵이 흘렀다. 『내일 대책을 발표한다』
·11월19일 상오 8시 청와대 본관 집무실. 강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은 실무자들이 새벽까지 다듬은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IMF 구제금융신청건도 포함돼 있었다. 김대통령은 묵묵히 듣고 있다 그들이 나가자 김용태 비서실장을 불렀다. 『좀 쉬라고 하제』 7번째 경제팀의 등장이었다.
하오 3시30분 과천정부청사 1동 7층 부총리 집무실. 막 임명장을 받고 돌아온 임창렬 부총리는 경제장관들과의 간담회를 소집했다. 그는 곧 발표할 대책을 짤막하게 설명했으나 IMF건은 언급조차 안했다. 하오5시15분. 회견장에서 발표문을 다 읽은 임부총리에게 IMF행 여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현재 한국경제는 IMF의 도움 없이도 국제금융계가 협력만 해 준다면 위기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은 이자를 꼬박꼬박 갚은 우량고객이다. 신뢰할 만한 정책을 내놓으면 여건이 나아지리라고 본다』 임부총리 역시 단호했다. 그 역시 정확한 외환사정을 몰랐었나. 아니면…. 그는 이날 밤 일본 미쓰즈카 히로시(삼총박)대장성장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했다. 그 사이 IMF와 미국 등은 「한국정부의 약속파기냐」며 비상이 걸렸다.
·11월20일 환율변동폭이 4배나 확대됐는데도 외환시장은 연 4일째 거래가 중단됐다. 19일 대책에 대한 외국반응은 차가웠다. 「미흡」「역부족」 「실기」…. 미국 정부는 『재무부를 중심으로 한국 상황을 예의주시중』이라는 논평을 낸뒤 곧바로 마닐라회의에 참석중인 티모시 가이드너 재무부차관보와 테드 트루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국장을 서울로 급파했다. IMF의 2인자 스탠리 피셔 부총재도 이날 하오 같은 비행기로 전격 방한했다. 한국의 대외신인도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정부는 나라밖의 긴박한 움직임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임부총리는 가이드너차관보의 면담요청에 빡빡한 일정을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다 그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의 「특사」라는 점이 밝혀지자 하오6시께 급히 만났다. 같은 시각 비상경제대책자문위원회 위원인 박영철 금융연구원장은 힐튼호텔 1911호실에서 피셔부총재를 만났다. 1시간30분 뒤 롯데호텔. 피셔부총재는 임부총리와 자리를 함께 했다. IMF 구제금융신청 발표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하오9시. 롯데호텔에서 이경식 한은총재는 「임창렬김영섭」팀과 회동, IMF행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한은 간부의 증언. 『이총재는 한참 후배격인 임부총리가 전경제팀과 합의했던 IMF행을 발표하지 않아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11월21일 상오 10시 청와대. 비상경제대책자문위원회 첫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대부분 IMF자금 이용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재경원측은 마지막까지 「IMF 지원요청결정」이라는 언론보도에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하오3시30분 재경원 기자실에서 열린 임부총리와의 간담회. 『2∼3일안에 IMF자금지원요청 여부를 결정하겠다』 그러나 하오 6시 정의동 공보관에게 「밤10시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밤 10시20분. 세종로 정부청사. 임부총리는 굳은 표정으로 발표문을 읽어 내려갔다. 『외화차입의 곤란으로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IMF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0월말까지 225억달러에 달하던 가용외환보유고는 이날 130억달러에 불과했다. 「펀더멘털(Fundamental·기초여건)」이 좋다는 말만 들었던 국민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정말로 바보가 되어(I`M Fool) 버렸다.
이날 하오 7시40분 청와대 경제영수회담장. 김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런 경제난국이 초래된데 충분히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언제 어떻게 사태의 본질을 알았을까. 그리고 무엇을 했는가.
◎당시 ‘선장실 빅3’의 항변/강경식“IMF 안가도록 노력했다”/김인호“누가 대통령께 직언하나”/이경식“고성장 정책이 환란야기”
「한국호」가 환란에 좌초할 당시 선장실에 있었던 강경식 전 부총리 김인호 전 청와대경제수석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등 3인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최근들어 조금씩 말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은 지겠지만 구조적인 문제였을 뿐,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 결과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를 밟은후 한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면 밟고 지나가도 좋다. 외환위기의 책임을 지라고 하면 지겠다. 그러나 나 한사람이 한국경제를 망칠 수 있다고 보는가. 우리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일찍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3월 취임할 때 외환보유고는 280억달러를 갓 넘은 수준이었다. 당시 제일 먼저 국가부도를 생각했다. 취임한지 한달이내에 나라가 부도난줄 알고 마음을 졸였다』(2월2일 사석에서)
『문제의 본질은 외환위기가 아니다. IMF보고서에도 나와 있지 않느냐. 구조적인 문제로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어서 외환위기를 언제 알았느냐, 언제 보고했느냐는 지엽적인 문제다. 왜 빨리 고치지 못하고 좌초했는가는 금융개혁법이 국회에서 좌절된 이후 외국투자자들이 한국을 못믿겠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IMF에 왜 빨리 가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누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경제적으로 마지막 선택이며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리더십이 문제다. 대통령 한사람으로는 안된다』(1월15일 개인사무실에서)
『잘못이 있다면 인정한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에 있다. 경상수지 적자가 나다보니 결국 그만큼 외채를 빌려온 것이다. 김대통령에게 「95년 고성장을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성장을 낮추고 긴축·고금리· 저환율 정책을 폈어야 했는데 10%에 가까운 고성장을 했다. 그때부터 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강부총리의 시장원리자체는 지지한다. 정부가 왜 그렇게 금융개혁을 고집했는지 모르겠다』(1월12일 집무실에서)
□특별취재반
이상호 경제부 차장대우
정희경 경제부 기자
이성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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