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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자본주의/함재봉 연세대 교수·정치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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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자본주의/함재봉 연세대 교수·정치학(한국논단)

입력
1998.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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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일 모델 답습 IMF로 미국식인가 국난 슬기롭게 이겨내 우리모델 창출해야” 현재 지구상에는 미국식, 유럽식, 일본식 등 세가지 유형의 자본주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세가지 형태의 자본주의는 나름대로 그것을 발명한 사회의 자연환경과 역사, 그리고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소수의 인구와 광활한 영토, 무한한 지하자원이 있었기에 철저하게 시장의 원리를 바탕으로 구축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사유재산권만 주장하더라도 남아 돌아가는 영토가 있었던 미국에서 이기주의는 곧 자유개인주의로 미화할 수 있었으며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이러한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미국은 아직도 의료보험과 같은 기본적인 복지정책조차도 국가 차원에서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식 자본주의는 직장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잔인한 제도다. 강력한 개인주의, 시장주의의 전통을 가진 미국사회에서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박애주의에 바탕을 둔 구세군과 같은 자선단체뿐이다.

 반면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 내에서 과밀한 인구를 가졌던 유럽의 산업화과정은 착취와 계급갈등의 잔혹한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된 서구식 복지국가는 계급간의 타협을 도출하고 유지하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 타협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생산하는 계급간의 갈등을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계급혁명이 아닌 복지제도의 도입을 통하여 이룩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타협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제도하에서는 전국민이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복지를 당연히 보장받을 뿐 아니라 직장이 없을 때에도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문제는 계급간 타협의 핵심인 복지제도가 과도한 재정지출을 야기하고 비효율성과 경쟁력 저하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들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률과 재정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세번째 유형인 일본식 자본주의는 불과 몇년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식과 유럽식의 장점만을 갖춘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각광을 받았다. 이 제도의 핵심은 높은 효율성과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국가와의 긴밀한 협조하에서 종신고용을 실현시킴으로써 국가에 과도한 재정부담을 주지 않는 동시에 개인들을 시장의 냉혹한 생존경쟁의 원리로부터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 특유의 공동체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수출을 적극 장려하고 내수시장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일종의 중상주의를 추구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은 일본이 전후 복구를 추구하던 냉전기간에 유지되었던 미국을 축으로 한 자유무역체제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업사회주의」라고 불리던 종신고용제는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면서 오히려 경쟁력 하락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고 일본 특유의 정부­기업간의 밀접한 관계는 부패와 비효율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랜 경험과 독특한 전통을 바탕으로 형성된 일본식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이것이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위기의 핵심이다.

 한국은 지난 30년 동안 일본식 자본주의를 따랐다. 그리고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IMF사태는 이 모델의 한계를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그리고 가혹하게 보여주고 있다. IMF체제란 다름아닌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일본식에서 미국식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자의반, 타의반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미국식의 시장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 형태를 과연 어느 선까지 도입할 것인가 하는데 있다. 종신고용제가 무너지고 서구식 복지제도가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제 우리에게는 더이상 모방하고 따라갈 자본주의의 모형이 없다.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은 한국이 처음 해 보는 것이다. 일본식에서 출발하여 성공을 거둔후 미국식 개혁을 강요받으며 그러나 완전히 미국식으로도, 또 그 대안인 유럽식으로도 갈 수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자본주의의 형태를 창출해 내는 길 밖에 없다. 우리가 이번의 국난을 무사히 극복한다면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은 미국식도, 유럽식도, 일본식도 아닌 한국식 자본주의일 것이며 그것은 가장 모범적인 자본주의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심각한 이유도, 또 이 위기가 기회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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