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육아부담 덜고/부대끼며 정도 늘고…물가는 치솟고 가장의 월급은 줄어드는데 핵가족시대의 씀씀이를 고집할 여유는 없다. 살림규모를 줄여 불황을 극복하려는 젊은부부들 사이에 대가족제로의 회귀 바람이 불고있다.
전형준(35·아시아나항공 서울여객지점 과장)씨는 IMF한파가 시작된 지난해 11월 분가계획을 취소했다. 결혼 6년만에 마련한 내집은 경기 탄현지구의 33평짜리 아파트. 분양대금을 마련하느라 살던 전세집을 처분하고 세식구가 6개월동안 능곡의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면서 학수고대했던 내집 입주였다.
그러나 막상 입주날이 다가오면서 전씨는 고민에 빠졌다.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 7,400만원은 금리가 뛰면서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고 연봉이 최근 500만원 정도 깎였다. 월평균 이자만 70여만원이 드는데 급여로는 생활비 대기도 빠듯했다. 전씨는 결국 새아파트를 5,000만원에 전세놓아 은행대출을 갚는 대신 부모님 댁에 계속 얹혀살기로 했다.
『요즘 대출이율이 20%선이니까 그때 입주를 강행했다면 지금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아파트 관리비는 부모님이 내시고, 생활비는 내가 내는 것으로 책임을 분담하니까 상당히 절약이 된다. 올해내 남은 대출금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씨는 전망했다.
외국인회사 부장인 이희진(34)씨도 최근 부모의 단독주택으로 들어가 함께 살기로 합의를 봤다. 월평균 500여만원을 받는 고소득자이지만 IMF시대를 대비하려면 긴축재정이 절실하다고 판단, 꺼려하는 아내와 부모를 설득했다. 이씨 역시 일산의 28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놓은 돈으로 은행대출 6,000여만원을 우선 갚을 계획이다.
『이제 월급장이들은 고용불안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장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럴때일수록 만일에 대비한 목돈을 갖고있고 싶다. 부모와 3년정도 함께 살면서 월급의 70%정도를 저축할 계획』이라고 이씨는 들려준다. 부모가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만큼 생활비는 아들인 그가 대부분 부담할 생각이다.
회사원 장익준(33)씨도 최근 인천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합치기로 정하고 전세살던 아파트 주인에게 퇴거의사를 밝혔다. 신혼인 장씨는 경기 화정지구의 30평짜리 아파트를 7,000만원에 전세내 살고있는 상태. 『빚은 없지만 월 13만원인 아파트 관리비나 7,000만원에 대한 금융소득을 계산해보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금은 금융상품에 투자할 계획이다』
원래 대가족제도는 가족이 생산단위를 형성했던 농경사회에서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창안된 협업형태. 각자가 거대조직의 구성원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가는 산업사회에서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3세대이상 대가족은 90년 138만가구에서 95년 127만가구(통계청 인구센서스)로 줄어드는 추세였다.
반면 실업률이 높은 서구에서는 나이든 자식이 수입이 없어 계속 부모에게 얹혀사는 신가족주의 대가족이 늘고있다고 사회학자 이동원(이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적한다. 통계로는 아직 잡히지 않지만 최근들어 주위에서 늘어나는 IMF대가족은 이런 신가족주의형 대가족의 변형인 셈. 경제난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생활비를 분담한다는 점에서 농경사회 협업의 장점도 있다.
어려울때는 그래도 가족밖에 없는 법. 경제적으로 협력해서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려는 사람들에게 대가족제는 가장 믿음직한 방편으로 각광받고있다.<이성희 기자>이성희>
◎합치기 전 고려할 점/가사분담·사적공간 명확히
젊은 사람은 돈이 문제라고 하고 나이든 사람은 돈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여러 세대가 합쳐 살면 분명 갈등요인이 늘어난다는 사실.
노모, 남동생 가족과 함께 살며 생활비를 책임지는 박모(51·여·사업)씨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내가 생활비를 대는데는 불만이 없다. 그보다는 손아래 올케가 어머니한테 무뚝뚝하게 대하거나 집안일은 분담하지 않고 자기네 식구만 챙길때, 가족이라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돈아끼려고 들어와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운하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경제력이 있는 시아버지, 직장 다니는 시누이와 함께 살면서도 가사노동은 물론 생활비를 혼자 책임지다시피하는 고모(37·주부)씨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집안 일이 힘들때 파출부도 쓸 수 있다』며 『돈을 나누는 것이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활비 분담론을 강조한다.
맞벌이 부부로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김연옥(35·경찰관)씨는 부모와 자녀 모두 만족스럽다. 시골에 살다 5년전 올라온 노부모는 며느리가 일나간 사이 집안관리와 손주를 맡아주고 아들부부는 경제를 책임진다. 아버지 김인곤(72)씨는 『시골서 쓸쓸하게 사는 것보다 좋지. 주말이면 꼭 나들이를 함께 하는 아들 며느리가 기특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개는 경제력이 있는 부모집에 들어간 자녀부부가 돈을 벌면서도 부모에게 생활비를 전적으로 기대거나 맞벌이 자녀의 경제력으로 사는 부모가 「그래도 손주는 못보겠다」고 함으로써 갈등이 심한 것이 현실이다.
사적인 공간이 침해되면서 생기는 불만도 크다. 박씨는 『퇴근하면 푹 쉬고 싶은데 방안에 조카 옷과 장난감이 널려있을때, 혼자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때 짜증난다』고 말한다. 고씨는 『내컴퓨터를 시누이가 맛들여 밤 12시까지 방안에 머물고 있는데 말도 못했다』며 밤 10시 이후에는 사적인 공간을 지켜주는 예의가 꼭 필요하다고 들려준다.
이때문에 경험자들은 새삼 대가족으로 합칠 생각이라면 노동과 생활비 분담, 사적인 공간구획에 대해 미리 명확히하라고 충고한다. 경제력이 있다면 식구수만큼 생활비를 분담하는 것은 필수. 가사노동도 요리 설겆이 빨래 청소 유리창닦기 쓰레기 버리기등 세목을 정해두고 배분을 하는 것이 좋다. 가정관리의 총책임자인 주부는 한명이어야겠지만 이 주부에게 모든 책임을 미뤄서는 안된다. 『저녁 9시 이후에는 주부도 쉴 권리가 있다』를 명심해야 한다고. 또 아들이든 딸이든 대가족의 매개가 되는 사람은 갈등의 중재자 역을 맡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돈을 아끼려고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한가족으로 살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가족으로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는 태도를 늘 지녀야 한다』고 경험자들은 입을 모은다.<서화숙 기자>서화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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