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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너머 또 산이(동창을 열고)

입력
1998.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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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께서는 지난해 12월18일의 선거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에서 일을 해오셨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평생 원하시던 대통령 자리에 앉아 한 5년 지내고 나니 그 자리에 이제 넌더리가 나셨는지 일찌감치 정권을 이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잘라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도 막상 앉아 보면 별 것이 아닌가 보죠. 대망의 2월25일이 멀지 않았습니다. 취임의 그날에 대비하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인수작업도 고비는 넘겼을 것 같습니다. 정계와 재계는 말할 나위 없고 심지어 종교계, 교육계마저 부정과 부패에 찌들어 버린 이 나라의 정권을 인수하는 작업도 힘겨울 것이지만, 이런 나라의 살림을 맡아 앞으로 5년 꾸려 나가는 일이,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숨이 가쁘고 땀이 날 지경입니다.

 김당선자께서는 운이 나빠서 그런지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지 어쨌든, 나라의 살림이 파산 일보직전에 갔을 때 대통령에 당선이 되셨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또는 도박과 유흥으로 가산을 탕진하여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장이 세상을 떠나고 어쩔 수 없이 그 집의 맏아들이 짐을 몽땅 도맡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들 딸에게 논, 밭은 물려주지 못해도 빚은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는데 「우리 집안」의 형편이 이 꼴이 되었으니 정말 민망스럽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래도 당선자께서는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줄곧 「준비된 대통령」임을 내세우셨으니 그 말씀에 기대를 걸어 봅니다.

 미국의 신문 잡지나 TV에서도 이제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대서특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뉴스가 새롭고 충격적이던 시기는 지났고 한국경제가 어느 정도 나름대로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돈을 꾸어주는 국제적인 돈장사들도 고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일 겁니다. 고리대금 업자들이란 세계 어디에서나 잔인하게 마련입니다. 되도록 이자를 많이 받고 싶겠지만 지나치게 높은 금리 때문에 우리 산업이 망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이제 금융위기가 매우 숨가쁜 고개를 하나 넘었다면 김당선자를 치하하고 싶은 것이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크고 험한 산이 또 하나 보입니다. 한자리 하겠다는 사람들이 당선자 주변에 우글거린다는 소식이 이곳 미국 교포사회에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매우 골치 아픈 일이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 그렇겠지만 여러해 꾸준히 모시거나 또는 선거때 열심히 뛴 사람들 가운데는 큰 감투 하나를 노리는 이들이 많게 마련입니다. 제가 선거 전에 후보자마다 당선되면 함께 일할 각료의 명단을 미리 발표하라고 했으나 한 분도 응하지 못한 데는 까닭이 있는 줄 압니다. 장관 한 자리도 못할 것이 뻔하면 선거에 도움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선을 방해하고 나설 사람도 있지요. 논공행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격분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 당선자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당선자의 측근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요직에 앉히지 않는다는 결정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좀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저는 풀이하겠습니다. 만천하에 인재를 구한다는 대원칙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유능한 측근을 단지 측근이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은 케네디대통령은 자신의 친동생 로버트를 법무장관에 기용하면서 『너보다 유능한 적임자가 없어서 너를 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는데, 사실 김영삼 대통령께서도 둘째 아드님 현철씨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기용해 정식으로 아버님을 돕게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정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국가에 해가 될 수 있는가를 절감한 바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달쯤 늦추어질 가능성도 있다지만 법대로 하자면 금년 5월에는 지방자치를 위한 선거 열풍이 불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들리는 것 같이 서울시장후보로 호남사람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하셨다면 그것도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호남사람, 영남사람을 가릴 필요가 무엇입니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김대중 당선자의 당선의 역사적 의의는 이 나라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타파할 뿐 아니라 초월하는데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유능한 인재가 단지 출생지가 전라도이기 때문에 서울시장이 될 수 없다면 그런 불행과 손해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앞으로의 인사가 능력본위, 인물본위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미국에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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