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첫 등장… “회화는 죽었다” 경악/초창기엔 은판사진 1889년 롤필름 사용/컬러는 1935년 대중화 20C 들어 예술영역 개척 이젠 컴퓨터 편집시대/국내 효시는 1884년 지운영의 묘동사진관 올해는 문화체육부 지정 「사진영상의 해」. 탈보트와 다게르의 요술상자가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이 1839년 8월19일. 한국에서는 1884년 지운영이 서울 묘동에 사진관을 세운 때를 시초로 삼는다. 사진의 역사 160년은 세계 근·현대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사진영상의 해를 맞아 사진의 과거를 살펴보고 미래를 조망하는 특집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편집자주>
「이것은 영혼도 정신도 없다」(시인 보들레르)
「이것으로 내일부터 회화는 죽었다」(화가 들라로슈)
「나는 이 새로운 예술에는 미개인이다」(화가 세잔)
「단추만 눌러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해드립니다」(1888년 코닥사 광고)
사진의 어머니는 인간의 이데아, 아버지는 기계신이었다. 이복형 회화에게는 나면서부터 열등감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은 영상을 잡아내는 이 신기한 매체를 경악과 환희로 맞이했다.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의 저자 발터 벤야민은 사진의 복제성은 「오로지 유일한 예술품」이 갖고 있던 「아우라(신기)」를 파괴, 예술에 대한 대중의 숭배적인 태도에 타격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화가들은 한결같이 사진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연으로 뛰쳐나와 빛을 보는 새 방식을 제시한 것도 사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사진기의 발명이 부르주아계급의 형성기에 이뤄졌다는 사실 역시 예술이 귀족 대신 대중에 복무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상징적인 배경이다.
그로부터 160년. 사진은 스스로 예술이기를 선언했다. 당대 미술전의 상징인 각종 비엔날레에는 사진이 넘쳐난다. 지난해 카셀도큐멘타와 베니스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가 그랬다. 『다음 세기의 컬렉션 대상은 오직 사진뿐』이라는 상업적 접근도 이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길에 당도하기 위해 사진은 기계와, 고급예술과, 그리고 사진가 자신과 지난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39년 영국인 헨리 탈보트가 염화은지프린트 사진을 발표한데 이어 같은해 프랑스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는 은판사진을 발표,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 좌우가 바뀌고 사진이 단 한 장만 나와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여기서 출발한 사진의 역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필름의 발달 역시 오랜 과정을 거쳤다. 1871년 리치 매독스가 고안한 젤라틴 건반은 1887년 미국의 한니발 굿윈과 존 카버트가 만든 셀룰로이드필름으로 대체됐고 1889년 이스트만 코닥사에서 롤필름으로 개선했다. 1861년 영국인 물리학자 제임스 클라크 막스웰이 삼원색을 이용한 컬러사진을 만들어냈고 영화의 발명자이기도 한 뤼미에르 형제는 1903년 오토그롬법으로 컬러사진을 실용화하는 데 일조했다. 1935년 코닥사의 「코다크롬」으로 컬러사진 대중화의 막이 올랐다. 거대한 원판사진기 대신 이스트만 코닥사는 1888년 책가방만한 크기의 핸드 카메라를 선보였고 이후 라이카 소형카메라를 거쳐 이제 손안에 충분히 들어가는 크기이다. 사진기술의 발달은 아예 카메라의 존재를 거부하기도 한다. 컴퓨터에 수록된 영상을 편집해 만드는 디지털사진은 스캐너로 사진을 입력하고 마우스 조작을 통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은 또다른 현실을 창조해낸다. 풍경화와 초상화 대신 초상사진과 풍경사진이 19세기의 주요 흐름이었다면 20세기에는 렌즈로 보는 세상이 본격화한다.
소형카메라로 세상을 표현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3등선실」(1893)과을 찍은 브래디의 다큐멘터리 사진, 1936년 「라이프」의 창간 이후 포토저널리즘은 사진역사의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가 됐다. 물론 신디셔먼, 낸 골딘, 바바라 크루거의 여성 신체사진작가들은 작가 의도를 담아 상황을 연출하고 인화에 회화적 요소를 가미한 「메이킹 포토」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베네통」같은 강렬한 광고사진, 패션 모드 사진은 20세기 다양한 변종 사진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잡았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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