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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웰 미 사령관(한국의 추억: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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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웰 미 사령관(한국의 추억:29)

입력
1998.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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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참전 진정한 ‘한국의 친구’/대사­미 사령관 가끔 충돌… 매주 조찬모임/한국사랑 남달라… 한미협회 창립/73년 사령관시절 체한 친교나눠/당시경험 대사직수행에 큰도움95년 7월말 미국 워싱턴 DC에서 거행된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은 내게는 참으로 감동적인 행사였다. 이날 제막식에는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등 한미 양국 정상이 모두 참석했다. 나는 김대통령이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대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나는 이번 행사가 한국인들에게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사실 서반구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전은 지구 반대편 저 멀리에서 벌어진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 불과했다. 한국전은 그러나 오늘날 미국 역사에서 한층 비중을 더해 가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 수도 워싱턴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잡은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데 가장 책임있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다름아닌 리처드 G 스틸웰 장군이었다고 확신한다. 스틸웰장군은 유감스럽게도 (91년 12월)작고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제막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숭고한 정신과 뜻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정열과 호소력, 인내심, 그리고 한국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신념을 되새겼다.

한국민들은 주한 미군사령관을 지낸 딕(리처드의 애칭) 스틸웰장군을 좋아했다. 비록 장군의 이름은 조만간 잊혀질지 모르지만, 그는 평생을 통해 한국민과 미국인들에게는 정말 영웅같은 존재였다. 장군은 양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한번이라도 마주쳤던 이들에게 한결같이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군인과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틸웰장군은 한국의 각계 인사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 장군이다. 한국 역사상 최연소 4성 장군인 백장군은 한국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스틸웰장군은 그러나 업계 지도자와 상인 등 그야말로 다양한 계층 인사들과도 친했다. 특히 한국 군부는 스틸웰장군이 웨스트 포인트(미 육사) 시절 보여준 남다른 기록(성적)과 2차대전 때 올린 전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25세때인 43년 미 육군 사상 최연소로 중령으로 진급되는 등 명성이 자자했다.

 나는 아내 세니와 함께 한국에서 잠시 머무르기 시작했던 73년 가을 이전부터 스틸웰장군과 안면이 있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때로부터도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군은 53년부터 56년까지 미 육군전쟁대학에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난 이후 우정을 이어 왔다. 이를테면 장군이 육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70년에도 우리는 긴밀히 협조했다. 당시 내가 이끌던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연구소(IIS)는 「태평양의 미래」에 관해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 학술회의를 후원했는데 장군은 이 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했다. 그만큼 그는 한국과 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중에 국무총리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한빈 박사도 이 회의의 주요 참석자였다.

 스틸웰장군은 한국전에 현역으로 참전했고 한국민들은 그가 주한 미군사령관으로 되돌아오자 몹시 기뻐했다. 나는 안식년 휴가기간이었던 73년과 74년 미 국방부의 부탁을 받고 한국을 방문했다. 스틸웰장군은 아내와 나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우리는 용산 미군 영내에 있던 장군 관저의 길 건너편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장군은 우리에게 자동차와 운전기사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당시 몇달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나는 한미 관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놀랄 만한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몇몇 문제점들도 짚어보았다.

 나는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곳에서 나는 짐 홀링즈워스 한미연합사령관과 미 제2사단의 행크 에머슨 사단장 등 2명의 미군 장성과 의견을 교환했다. 이 두 장군들은 노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포트 브래그와 미 육군전쟁대학 시절부터 나와 아는 사이였는데 에머슨 장군은 「건파이터(Gunfighter)」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나는 당시 2사단에서 홍보 및 사회문제 담당부서에서 근무했던 콜린 파월 중령과도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잘 알다시피 파월중령은 91년 걸프전 당시 미 합참의장으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73년 하반기만 해도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는 진한 동지애가 있었다. 이는 물론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양국군이 공유한 경험을 토대로 형성됐다. 그러나 한국 군부 지도자들이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에 우려를 표시하는 미국인들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그같은 태도를 전혀 불필요한 야만적 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스틸웰장군도 이 문제 때문에 적잖이 걱정했다. 그는 이에 관해 한국군 최고위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 문제를 주제삼아 나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 시절 내가 관찰했던 일부 문제점들은 그로부터 8년뒤인 81년 주한 미대사로 부임한 이후 대사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미 대사관과 주한 미군과의 관계는 썩 매끄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스틸웰장군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데다 넘치는 지성미를 자랑하며 어떤 때는 마치 대사인 듯이 행동했다. 당시 미 대사관을 이끌던 필립 하비브 대사도 또한 일류급 지성인인데다 성격이 깐깐한 사람이었다.

 하비브대사와 스틸웰장군은 몇몇 사안을 둘러싸고 심한 의견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가 됐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비브대사가 골프에 흥미를 느끼고 골프광이 된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스틸웰장군은 당시 용산에 있던 미8군 골프장에서 둘 사이의 현안을 풀어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스틸웰장군은 하비브 대사의 후임인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와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미 대사관과 주한 미군 사이에서 불거진 문제의 상당 부분은 종종 워싱턴의 국방부와 국무부간에 존재하는 깊은 불화를 그대로 반영했다. 물론 미국 대사가 해외에 주재하는 「컨트리 팀(Country Team)」의 수장이며, 해외주둔 미군사령관보다 서열이 높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부 지도자들은 논쟁이 격렬해지게 되면 「줄무늬 바지차림의 친구들(Striped Pants Boys)」은 안보와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국무부도 이에 대해 『군부는 지나치게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맞서는 등 양측간에 긴장이 흐를 때가 적지 않았다. 일부 동맹국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내에서 이같은 분열이 일어나고 헌법에 따라 권력을 분할하는 미국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73년 당시 미 대사관과 주한 미군간의 문제점들을 생생히 목격했던 나는 81년 대사로 부임하면서 한가지 결심을 했다. 즉 양측이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는 5년6개월 가까운 임기동안 매주 수요일 주한 미군사령관과 정례 조찬모임을 가졌다. 대사관 참모들은 대사관저와 사령관저에서 번갈아 열린 조찬 회동에서 우리가 심각한 이견이나 논쟁에 빠져들지 않도록 전날 밤 열심히 브리핑 서류를 작성했다. 사실 나는 부임에 앞서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스틸웰장군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되돌아 보면 스틸웰장군이 주한 미군사령관을 지낸 73년부터 76년까지가 한미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기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박정희(박정희) 행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구가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틸웰장군 같은 사람이 미군사령관이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했다. 왜냐하면 스틸웰장군은 박대통령과 그의 동료들보다 경험이나 계급면에서 「고참」이었기 때문이다. 군부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은 스틸웰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73년 당시에는 박정권을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민들은 조국이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에 차 있었으며, 성공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들은 생활 여건이 좋아지고 있으며, 조국이 과거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박대통령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세계은행과 서구 지도자들의 비난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남부 지역을 연결하며 경제발전의 훌륭한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경부고속도로는 남서부 지역인 전라도를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두고두고 문제가 될 소지를 남겨두게 됐다.

 당시는 분명 산업발전과 함께 생활 수준도 급속히 발전하는 시기였다. 박정권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 덕분에 시골 마을에도 전기와 수돗물이 공급됐으며 농촌 사람들의 보건 상태도 크게 개선됐다. 이처럼 전쟁으로 파괴되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농촌 마을이 말끔하게 단장됐다. 바야흐로 한국이 근대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73년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하나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 변화는 그러나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전 당시 나는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서울에서 대만으로 간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진흙 투성이의 메마른 한국 야산과는 달리 울창함을 뽐내는 대만의 대비되는 모습을 보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박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산림녹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데 있다. 식목일에 모든 사람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비결은 그의 강인한 군인정신 덕이 아닌가 싶다. 그는 산림녹화 사업을 주도했고 이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야산은 일제강점기때, 특히 2차대전 당시 크게 훼손됐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야산과 언덕에는 전나무를 비롯한 많은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 푸르름이 더해가고 있다.

 또 스틸웰장군과 나는 당시 한국의 생활양식에 파고드는 미국인들의 영향과 결과등에 대해 장시간 토론했다. 스틸웰장군은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백선엽 장군과 유병현 장군등 자신의 오랜 친구들과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스틸웰장군은 내게 한국 군부가 자유의 수호자라기보다는 압제자로 비쳐지지 않도록 미국인들은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찌됐든 한국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이 필요했다. 스틸웰장군은 이 문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으며, 한국전 당시 맺은 동지애를 이용해 박대통령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그 시절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스틸웰장군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다. 우선 나의 한국 경험과 관련해서도 그는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 아침 커피를 즐기는 넉넉함, 부인 또는 친구들과 고즈넉한 저녁을 함께 보냈던 그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세니와 나는 스틸웰장군과 놀랄 만큼 우아한 그의 부인 앨리스 덕분에 한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많을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스틸웰장군과 백선엽(일명 휘트니)장군이 손잡고 한미안보 문제를 연구하는 협회를 창설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 협회는 지금도 서울과 워싱턴에서 번갈아 가며 연례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은 한국전의 교훈들이 잊혀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내가 대사직에서 물러나자 스틸웰장군은 이 협회의 이사로 일하도록 주선했다. 나는 지금도 이 협회 일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 중 하나는 미래 세대의 지도자들과 군의 핵심 참모들에게 우방국인 한국의 중요성을 전달해 주는 데 있다. 동북아시아의 미래 평화와 관련해 한국이 지닌 의미도 전해주고 있다. 이 협회와 한국전 참전 기념비건립위원회는 모두 한미 우호협력에 기여한 스틸웰장군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정리=이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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