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나올 구멍없고 신용카드빚 연체… 또 연체/자칫 신용불량 낙인 업무상 접대가 많은 영업부서에 근무하는 중견기업체의 C과장(36). 지난 연말 자신의 신용카드 2개를 가위로 잘라버렸다. 한달에 30만원씩 현금으로 지급되던 접대비도 끊긴데다 연말 보너스도 나오지 않아 카드를 쓰다 보니 카드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12월에 결제해야 할 카드빚 50여만원을 우선 처리해야 했다. 곰곰 생각해봐도 묘안이 없어 아내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아내는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용카드를 가위로 자르면 5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1차 부도」는 이렇게 굴욕적으로 면했다. 그래도 또 다른 카드빚 70여만원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은행 직원이 회사로 간간이 전화를 걸어 결제일과 연체액, 연체이자를 알려준다. 얄미울 정도로 친절하다.
얼마전이라면 70만원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돈 나올 구멍은 없고 구원을 요청할 곳도 마땅치 않다. 보너스도 못받아 온 주제에 아내에게 70만원이라는 거금을 달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C씨가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카드를 없앴다고 돈 쓸 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영업활동을 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의 한 잔 제의를 궁색하게 핑계대기도 한 두번,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몇 만원을 근근히 꿔서 약속 장소에 나가도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좌불안석이다. 먼저 계산을 하면서 호기를 부리던 것은 옛일이 됐고 끝까지 눈치를 보다 상대방이 계산한 뒤에야 한숨을 돌린다. 맥주 한 잔 더하자는 제의도 아들 방학숙제 봐줘야 한다는 핑계로 겨우 뿌리친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생각해보면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화가 치민다. 속모르는 집사람은 『남편이 일찍 들어오니 좋다』며 반긴다. 돈 몇푼이 사람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나.
중소제조업체에 다니는 P대리(32). 올해초 아주 친한 친구 아들의 돌잔치에 초청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직장에서 회식이 있다는 핑계를 둘러댔으나 돌반지를 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너스와 월급이 줄어들고 주당 5∼6만원의 용돈을 받아 연명하는 신세다. 5만원이 넘는 돌반지를 사 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사촌동생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다가 친척들에게 한마디 들었다.
P씨에게 지금 사교니 모임이니 하는 것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 누가 소주라도 한 잔 하자면 먼저 나오는 말이 『유 페이(You pay)?』다. 동료들간에도 몇푼 안되는 술값 때문에 의리가 상한다는 느낌도 든다. 그는 승용차 대신 버스를 타고 식사도 구내식당에서 해결한다. 담배도 1,000원짜리 「디스」대신 200원짜리「솔」을 살 때도 있다. 그렇지만 용돈의 절대액이 적다보니 P씨의 주머니는 늘상 비어있다. 차계부나 가계부를 쓰는 동료들도 있지만 그들은 형편이 나은 부류. 한줌도 안되는 용돈 씀씀이를 기록하는 것도 낮간지럽다. 『여유 있던 시절에 비자금이라도 좀 만들어놓을 걸…』후회도 부질없고 상황이 호전될 기미도 없다. IMF가 그저 피곤하다.<조재우 기자>조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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