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외채조정협상의 실무 협의가 본격 개시되던 23일 하오 맨해튼 씨티은행 본점. 한국 외환사태의 중대 고비가 될 협상을 지켜보기 위해 은행 로비에 몰려있던 국내외 취재진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당초 2시로 예정된 회의에 맞춰 협상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미 한시간전 대표들이 입장했으며 회의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TV카메라를 걸어 놓았던 미 언론등 외신들조차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역사적 회의면 으레 등장하는 포토세션이나 악수교환 사진 한장없이 협상은 그렇게 시작됐다.알아본 자초지종은 이랬다. 이날 윌리엄 맥도나우 뉴욕연방준비은행(FRB)총재 주최 조찬에 참석한 우리 대표단은 채권은행단측으로부터 별다른 일이 없으면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시간은 12시반, 장소는 회의가 열릴 씨티은행. 도착해보니 우리 대표단을 기다리고 있는 「밥상」은 샌드위치에 음료수가 전부였다고 한다. 이른바 「비즈니스 런치」. 아침부터 회동한 은행단의 대표들은 그때까지 격론을 벌이며 가끔 한사람씩 나와 샌드위치를 한입씩 베어물고 다시 회의장에 들어갔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다보니 자연 30분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1시부터 협상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를 듣고 「물 먹은」 기자로서 서운함은 감추기 힘들었다. 하지만 기자들의 항변에 대한 협상단 정인용 국제금융대사의 「변명」은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그는 『프로토콜(격식)을 중시하는 외교 석상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은행가들과의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바로 우리의 상대가 누구냐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도 노련하기 짝이 없는 경제9단들. 실리와 실용을 좇는 철저한 자본주의 신봉자들. 이들에게 애초부터 형식이나 틀을 기대했던 것이 무리였다. 나아가 오늘의 외환 위기도 외교관행에만 의존하는 정부, 기업의 경직된 대처로 심화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다. 앞으로 국제관계는 비즈니스에 더욱 치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번 협상의 소중한 교훈으로 「우리에게 비즈니스 마인드를 심어줬다」는 것을 주저없이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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