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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나눔의 설/정채봉 동화작가·동국대 겸임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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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나눔의 설/정채봉 동화작가·동국대 겸임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8.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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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알고 있다.한 마을에 살인사건이 생겨 살인자가 징역살이를 떠났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징역사는 그 사람한테 설명절을 맞아 특사로 석방된다는 전갈이 온다. 그는 한편 기쁘면서도 한편은 슬퍼한다. 징역살이에서 풀려나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고향에서 농사짓는 일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는 고향외에는 달리 갈 데가 없는 것이 슬픔인 것이다.

고민 고민하던 그는 자기 고향 이장한테 편지를 띄운다. 먼저 용서를 청한 다음 고향밖에 달리 갈 데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이 받아들여 준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면서 만일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줄 의사가 있다면 그믐밤에 동구밖 석등에 불을 밝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그는 멀리서 그의 고향 동구밖 석등에 불이 밝혀져 있다면 고향을 찾아들겠지만 불이 밝혀있지 않다면 발길을 돌려 타향살이로 생을 마칠 수 밖에 없다는 가련한 사연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섣달 그믐밤 모든 사람들이 고향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는 그 시간에 그도 자기 고향이 내려다 보이는 고갯마루로 올라간다. 동구밖 석등에 불이 밝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런데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자기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갑자기 눈물이 펑펑 솟는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구밖 석등에 불이 하나만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구밖 길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손에 손에 등불을 밝혀 들고 줄지어 마중을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설이 찾아왔다. IMF로 등 구부러진 신세가 되었지만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발길은 바쁘기만 하다. 어느핸가 섣달 그믐날에 전화를 걸려고 공중전화 부스 밖에 서 있다가 본의 아니게 앞사람의 전화 사연을 드문드문 엿들은 적이 있다. 그 중년의 남자는 엄동인데도 홑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수화기에다 대고 몇번이고 『애비가 죄가 많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 누구한테 진 빚을 언젠가 꼭 갚겠다고 전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너희 남매 옷을 사서 소포로 부쳤다』면서 다음 명절때 만날 희망을 가지고 살자며 수화기를 놓았다. 담배를 낀 손이 가늘게 떨리던 중년의 남자,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서인지 고개를 하늘로 제끼고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내 눈에 밟히는 것은 세상살이가 더욱 스산해진 때문이리라.

물론 빚을 진 사람도 죄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등불을 켜들고 마중나오던 그 마을 사람들처럼 마음을 열고 맞아주는 아량을 기대해 보는 것은 나만의 여린 생각일까. 어릴 적 고향에서의 섣달 그믐밤이 생각난다. 부엌이며 측간이며 큰방 작은방 가릴 것 없이 온통 밤새워 밝혀놓던 등불을. 이는 잡귀가 없는 새해를 맞고자 하는 바람의 등불이겠지만 어쩌면 먼데서 방황하는 가난한 길손을 부르는 불빛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설은 분명 우리에게 새 희망을 주는 화평의 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고 작은 것도 나누어야 할 이 복된 날이 원한과 미움으로 얼룩진 채 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옛날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심의를 하던 때 본 단편영화가 떠오른다. 그땐 무심해서 감독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이 유럽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고장에서 저 고장으로 옮겨다니는 유랑극단이 있는데 이 극단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문지기이다. 그는 입장료를 숨겨서 술을 먹고 주정을 하고 심심하면 관객이고 단원이고 가리지 않고 싸움을 일으켜 늘 막대한 손해를 끼친다. 견디다 못한 유랑극단 사람들은 이 한 사람만 없어지면 행복해 질 것 같은 생각에 암살을 결행한다. 그러나 이 한 사람만 없어지면 행복할 것 같던 유랑극단에는 또 한 사람의 문제인이 생겨난다. 단원들은 합심해서 이 문제인도 죽인다. 이렇게 문제인은 계속 생겨나고 살인은 계속되고….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은 혼자 남은 극단장이 유랑극단의 깃발을 어깨에 메고 바다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가운데 미운 사람이란 늘 이처럼 있게 마련이다. 이를 사랑으로 끌어안지 않고 제거만 하다보면 맨 마지막은 미움의 상대가 바로 자기 밖에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올 설에는 미움을 덜어내기보다는 끌어안고 화해하는 「우리」가 되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이웃에게 진정한 덕담을 선사해 진정 평화의 날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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