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통령에 예상못한 ‘머리 숙이기’/첫 회견 한국말 인사 좋은반응… 열심히 배워/두손으로 봉투내밀자 전 대통령 한발짝 물러서 할 수 없이 몸 더숙여/YS에 제정하는 사진도 ‘고개숙인 대사들’ 개인탓보다 관행인듯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길조였다. 우리 부부는 81년 7월 31일 대한항공(KAL) 001기편으로 하오 7시 30분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일본까지는 미국 항공기를 이용했는데 환승시간이 여의치 않아 도쿄(동경)에서 한국 항공기로 갈아탔다. 나는 아내 세니에게 『내가 증진하려는 양국의 상호 협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부임 준비를 위해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국무부 언어연구소의 한 강사와 함께 서울 도착시 행할 연설을 한국말로 연습했다. 그는 내게 한국말 발음과 긴 문장을 기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같은 노력이 (한국민들의) 호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니와 나는 시차극복이 채 안된 상태였지만 공항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짧은 기자회견에 응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한국에 되돌아오게 돼 매우 기쁘다고 줄줄 외우듯 말했다. 나의 발언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음을 이내 느낄 수 있었다.
며칠후 코리아 타임스에 글을 싣던 미국 여류작가 존 카터 커벨이 내 기자회견에 관해 칼럼을 썼다. 그녀는 TV로 기자회견 모습을 지켜본 한국 친구의 반응을 소개했다. 그녀의 칼럼은 다음과 같다. 『그 친구는 「(신임 대사가) 한국말로 얘기했어요. 누구나 암기할 수 있는 단지 한 문장이 아니라 꽤나 긴 연설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내 눈물 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아세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한없이 기뻐할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부부가 결연한 의지를 갖고 한국말을 계속 배우기로 결심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다행히 우리는 품위있고 친절한 연세대 출신의 이경희씨를 설득, 한국말을 배우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은 어른이 됐지만 정말 귀여운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우리는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일주일에 다섯번씩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우리 부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우리가 한국의 관습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등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마치 딸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해주곤 했으며, 결국 우리는 그녀를 「수양딸(Korean Daughter)」로 삼았다.
서울 도착 기자회견에서는 내가 예상했던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한국을 얼마나 자주 방문했느냐는 질문에도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기자들에게 기간이 만료된 여권이 수두룩하고 한국전 이후 50번도 넘게 방문했다고 대답했다.
존 A 위컴 장군과 존 몬조 부대사을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도 공항까지 마중나왔다. 위컴 장군은 나를 환영하는 의장대 행사를 준비했다. 공노명 당시 외무차관등 많은 한국 친구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아내에게 『공항 행사에 참석한 사람중 미국인보다 한국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이 더 많다』고 말했다. 어쨋든 나는 대사 부임의 첫 발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도착 다음날 저녁 우리는 관저에서 대사관 직원 모두를 초청해 리셉션을 열었다. 이 리셉션에는 배우자와 자녀등 250명이 넘게 참석했다.
세니는 미국인 여성클럽 회원들과 함께 일련의 나들이에 나섰다. 그러던중 불행히도 서울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견직 공장을 견학하다 계단에서 금속 쪼가리를 밟는 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2주 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상처는 한달이 지나서야 완전히 아물었다. 그러나 아내는 환영행사가 열릴 때는 관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병실에는 15년 넘게 친분을 맺어 온 한국 친구들이 보낸 꽃으로 가득했다. 물론 문병객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내는 특별한 한 리셉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나는 8월 6일 아내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를 강행해야 했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등과 배우자들을 관저로 초청한 이날 행사에는 손님이 자그마치 350명이나 됐다. 우리는 참석자중 5분의 4가 넘는 사람들이 이날 처음 대사관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몇몇은 4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한미 양국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정말 충실한 대사관 직원들이었다. 세니와 나는 이들 훌륭한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번갈아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부임 초기에는 할 일도 참 많았다. 한국 정부의 모든 각료들은 내가 일일이 찾아가 인사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각료가 모두 26명이나 됐다. 방문때마다 부처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 한편 그 부처와 관련된 한미 관계를 주제로 이야기했다. 한사람의 각료를 방문하는데도 반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내가 이들에 대한 방문을 막 끝마칠 무렵 전두환 대통령이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나는 몇몇 동료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나에게 열심히 일을 시키려고 작심한 모양이라고 농담했다. 아무튼 개각 덕분에 나는 부임 첫해동안 자그마치 52명의 각료들을 개별 방문했다.
부임 첫주에 나는 노신영 외무장관을 방문해 신임장을 전달했다. 노 장관은 그 전에 잘 몰랐지만 이범석 통일원 장관과는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도착 하자마자 연락을 취했다. 그는 노 장관 후임으로 이듬해 외무장관이 됐다.
8월 18일에는 오랜 친구이자 경제에 비상한 재주가 있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방문했다. 한국 신문들은 미국 대사가 정래혁 국회의장, 이승윤 재무장관, 서석준 상공장관등 다양한 한국 지도자들과 접견하는 사진을 거의 매일 실었다. 서장관은 후에 경제부총리로 발탁됐는데 애석하게도 2년뒤인 83년 9월 양곤 폭탄테러 당시 숨졌다.
마침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공식 제출해야하는 날이 왔다. 이 행사는 8월 12일 아침에 마련됐다. 외무부 의전국은 식의 진행과정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보내왔다. 대사관 직원들은 모두 예복을 입어야했다. 특히 나는 예장용 모자(Top Hat)를 준비해야 했다. 프랑스 궁정 모델을 토대로 한 서구식 관습에서 파생된 지침들은 마치 무대 상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 같았다. 모든 절차는 외무부의 김형근 의전장과 청와대의 김병훈(미국명 마이크 김) 의전 수석이 주도했다.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과 중국 관계에서 발생한 유명한 사건, 즉 영국의 매카트니 경이 베이징(북경) 궁전을 방문하자 첸룽(건륭) 황제의 의전 담당자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커우터우·고두)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전달할 두 개의 봉투를 가져갔다. 하나는 내가 대사직에 임명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신임장」이었고 또 하나는 (한국) 대통령이 대사직에 다른 사람을 원할 경우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소환장」이었다. 소환장은 그러나 한미 양국간 공식적 외교관계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지침에 따르면 나는 두 손을 내밀어 이 두 개의 커다란 봉투를 대통령에게 전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하자 전대통령은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때문에 나는 몸을 더 숙일 수밖에 없었고 공식 사진사는 바로 이때 신임장 제정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음날 아침 한국 신문들은 미국 대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진을 실었다. 사진을 찍은 뒤 나는 수행했던 몬조 부대사와 특별 고문, 정치참사, 공보관(오랜 친구인 버나드 레빈은 한국에 오래 머물렀었다), 국방부 소속 무관등을 소개했다. 한국측에서는 노 장관과 김경원 청와대비서실장, 외무부 의전관, 그리고 마이크 김이 참석했다. 마이크 김의 통역아래 전두환 대통령과 10분정도 조용히 대담을 나눌 기회도 있었다. 그리고 의장대 사열을 받은 뒤 나는 호위차량과 함께 관저로 돌아왔다.
나는 이후 다른 대사들이 신임장을 제정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사진들은 한결같이 허리를 굽히고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한발짝 물러나 대사들이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것은 그의 스타일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신임 영국대사인 L J 미들턴이 도착했을 때 나는 그가 신임장을 제정하기에 앞서 그의 관저를 찾아가 「사진찍기」에 대해 귀띔해주었다. 그의 관저는 우리 관저 인근에 있는데다 영국과 미국은 특별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매카트니 사건을 끄집어낸 뒤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86년 10월 16일 신임장을 제정했다. 다음날 신문에는 그러나 그가 나보다 더 고개를 숙인 사진이 실렸다. 이반 네메스 헝가리 대사가 95년 9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신문 사진은 더욱 고개 숙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신임장을 받는 한국 대통령의 의전 관행은 똑같은 행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전두환 대통령 개인 탓으로 돌릴 사안이 아니었다.
신임장 제정을 전후해서도 나는 분주히 각종 활동에 참여했다. 8월 5일 나는 평택에 들렀고 그 이틀뒤에는 미군을 격려하기 위해 오산 공군기지를 찾았다. 8월 16일에는 존 위컴 장군(주한미사령관)과 비무장지대(DMZ)의 초소들을 순시한 뒤 장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8월 27일에는 윈필드 스콧 장군과 진해 해군기지를 방문했고 다음달에는 F16 전투기들이 군산 공군기지에 처음으로 도착하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이런 활동들은 내가 워싱턴을 출발하기전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합의한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일부분에 불과했다. 우리는 대사관이 미군을 전폭지원하는데 합의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맹국 한국의 안보에 전념하는 「컨트리 팀」을 갖는데 성공했다.
나는 또 당시 주한외교 사절단장이었던 파란즈페 인도대사를 필두로 서울 주재 외교단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에 가장 오랫동안 체재한 외교관이었다. 물론 부임 초기인 당시에는 내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미협회 회장인 송인상씨는 나와의 옛정을 되새기면서 내게 연설을 부탁했다. 미국 상공회의소 지도자들도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정례모임을 갖기로 했다.
대사관내 직원들과 안면을 익히는 일도 중요했다. 나는 일류급 참모들을 거느린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게됐다. 그리고 우리는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아내와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화목한 「대사관 가족」이 됐다. 한국 외무부 인사들도 감동적이었다. 이는 대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기분좋은 조짐이었다.
나는 (재임기간동안) 매사가 항상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애국심으로 충만된 재능있는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게 됐다. 그들은 한국 정부와 군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대사관내 직원들도 그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북한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한미 양국의 역량은 내가 도착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시험대에 올랐다. 북한군이 우리의 SR71 정찰기를 지대공미사일(SAM2)로 격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서울 도착 첫 2개월동안 나는 주한 미대사직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간파했다. 대사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지만 그래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행운을 누렸다고 생각한다.<정리=이종수 기자>정리=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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