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하오 7시20분께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김포공항 방향으로 가는 전동차의 맨 앞칸에 올라탔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용하지만 5호선은 언제 타도 기분이 좋다. 밝고 깨끗하고 사람도 적당해 쾌적하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 있는 사람이 20여명 정도로 공간이 많아 역시 5호선 다웠다.손잡이에 매달려 가다가 눈앞의 벽에 붙어 있는 광고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달랑 한장이 외로이 자리잡고 있었다. 새삼 생각이 나 전동차 안의 벽을 둘러보았다. 광고포스터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모래밭에 콩 나듯 띄엄띄엄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패션광고 포스터 등이 벽면이 좁다는 듯이 어깨를 비비며 자태를 뽐내던 때가 정말 거짓말 같았다. IMF한파가 이곳에도 미치고 있었다.
IMF한파에다 대한추위까지 겹쳤기 때문인지 전동차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없어 더욱 그러했다. 차라리 장사꾼이나 구걸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자리에 앉은 승객들은 신문을 읽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특히 이날 따라 신문을 읽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마치 전동차 안에 하얀 「신문꽃」이 핀 것 같았다.
하도 신문 읽는 사람이 많아 호기심에서 한번 세어 봤다. 자그마치 승객의 반이 넘는 38명이나 됐다. 아침 출근 때와는 달리 스포츠신문을 읽는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나온지 얼마 안되는 20일자 조간신문의 가판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중엔 경제신문을 펼쳐든 사람도 상당수에 달했다. 18일 저녁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국민과의 TV대화를 하고 19일 낮엔 현대와 LG그룹이 구조조정을 발표해 독자들의 구독열을 자극했기 때문으로 생각됐다.
IMF한파가 몰아친 후 신문도 경제관계 기사가 두드러지게 많아졌다. 사회 정치 문화면까지도 IMF한파에 떨고 있다. 때가 때인 만큼 이날 전동차 안에서 신문 읽는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경제관계 기사에 매달려 있었다. 대충 훑어 보는 것이 아니라 정독하는 모습이었다.
신문을 읽다가 내려야 하는 역에 도착하면 신문을 정성스럽게 접어 들고 나갔다. 아침에 스포츠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내릴 때 신문을 접어 전동차 선반 위에 던져 놓고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달리 이날 신문을 보던 사람들은 집에 가서도 다 읽지 못한 경제관계 기사를 챙겨서 읽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인지 신문을 들고 나갔다.
IMF한파가 몰아친 후 모두 경제를 알려고 필사적이다. IMF위기가 한국국민을 모두 경제전문가로 만들고 있다고나 할까.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란 말처럼 신문을 통해 우리가 처한 어려운 환경을 정확히 알고 지혜를 얻으려는 이러한 국민들의 태도는 한파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것이다.
아프리카 탕가니카호에 살고 있는 「Perissodus Microlepis」란 물고기는 광어처럼 두 눈과 입이 왼쪽에 모여 있다. 이들은 다른 물고기의 오른쪽을 공격해 비늘을 뜯어 먹고 산다. 이들에게 오른쪽 비늘을 빼앗긴 다른 고기들은 오른쪽을 경계하게 된다. 이때문에 먹이 얻기가 힘들어진 이들 고기들은 다음해엔 도다리처럼 눈과 입이 오른쪽에 붙어 있는 새끼를 많이 생산한다. 이들 새끼들은 다른 고기의 허를 찌르듯 경계가 허술한 왼쪽을 공격해 비늘을 먹는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려는 기발한 지혜이자 변신이다.
우리 국민들도 경제를 공부하고 금과 달러를 모으는 등 IMF한파를 이겨내려고 뛰어난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금과 달러 모으기운동은 한국경제의 추락을 비웃고 있을 선진국들의 허를 찌르고도 남았다. 인간은 고기처럼 신체적 변화는 꾀할 수 없지만 사고란 무기를 지니고 있다. 어려운 때 일수록 지혜를 모으고 생활의 변신을 해야 한다.
금과 달러 모으기운동이나 전동차 속에 핀 신문꽃은 바로 우리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상징으로 보고 싶다. 현재와 같이 지혜를 모으고 고통분담하며 근검절약하면 IMF한파도 풀려 전동차 벽면에 옛날처럼 다시 「광고포스터 꽃」이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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