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노사정위원회는 기업구조조정과 고용조정 법제화 조치를 앞두고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간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정리해고 입법을 전제로 한다면 노사정위원회 참가 자체를 거부하겠다던 노동자들로서는 뉴욕으로 간 채권협상단이 한국에 유리한 협상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크게 양보한 셈이다.그러나 노사정위원회의 한 축을 이루는 재벌들은 경제위기의 책임부담과 재벌개혁에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일 발표된 현대 LG 두 재벌의 구조조정 방안은 IMF가 요구한 상호지급보증 축소와 결합재무제표 작성, 사외이사제 도입 등은 이행키로 했으나 총수의 재산출연이나 지배구조 개선, 주력업종과 한계사업 정리계획을 구체적으로 내놓지 않았다.
21일 삼성은 총수가 1,280억원의 재산과 배당수익의 90%를 출자하고 중앙일보를 분리하기로 했지만 총수의 재산출연은 기업을 회생시키고 외국인자본의 인수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조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재벌측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불만족, 『이번만은 적당한 구조조정을 해서는 안되고, 합의대로 강도높고 철저한 개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김당선자측은 재벌들이 합의를 지키지 않을 경우 재벌총수의 개인재산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고, 합의 이행수준에 따라 금융권의 여신관리에 차등을 두는 방안을 검토중이며 경제청문회를 통해 책임을 추궁하는 문제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재벌들이 개혁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김대중 당선자측의 재벌개혁 추진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재벌개혁의 방안으로서 강제적 소유분산 내지 소유와 경영의 분리안을 배제함으로써 재벌들의 개혁기피에 대처할 방법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13일 김대중 당선자는 4대 재벌총수들과의 모임에서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재산환수(강제적 소유분산)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또 18일의 TV토론회에서는 민주노총이 경제위기에 대한 재벌책임 추궁으로 재벌총수의 퇴진, 즉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요구한 데 대해서 『잘못한 정권은 선거로 바꾸지만 잘못한 경영진은 주주총회에서 바꾸도록 할 수 있을 뿐이다』며 『소액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사외이사도 경영에 관여토록 해 경영의 투명성이 보장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IMF구제금융 결정이후 경제위기의 책임으로 퇴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까지 하고 있었던 재벌총수들은 김당선자의 이런 태도에 안심하고, 책임회피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둘째, 법률적 제도적 조치를 통하지 않고 설득과 권고로써 재벌 스스로 개혁하라는 주문은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재벌은 노태우정권과 김영삼정권하에서 재벌규제정책이 나올 때마다 갖가지 방법으로 이를 무력화 시킨, 산전수전 다 겪어온 집단이다. 시급한 노사정 대타협을 위해 재벌들이 자율적으로 솔선하도록 하는 조치는 필요하지만 명분이나 당위론을 앞세워 개혁을 추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총수재산 출자가 초법적 요구라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제도가 아닌 설득 내지 권고로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영삼정권이 개혁을 하면서 법률과 제도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의 의지로 추진하다가 좌초하고만 선례를 봐도 분명하다. 재벌의 언론지배 문제도 부실기업 정리 차원이 아니라 흑자를 내는 언론기업이라 할지라도 재벌 내지 산업자본은 언론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제위기의 책임추궁과 향후 기업경영 합리화 차원에서 재벌체제 해체는 시급하다. 사실 외환위기는 외국투자가 입장에서 본다면 재벌기업을 믿고 돈을 빌려줬다가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국투자가들의 가장 중요한 주문도 대기업들의 과다차입, 문어발식 과잉투자, 도산 등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재벌의 행태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너경영체제를 전문경영체제로 바꾸고 계열기업들을 독립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즉 재벌체제를 개선(오너경영을 합리화)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니라 해체(오너지배체제의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총수와 비서실의 지위와 책임을 분명히 한다는 취지로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하는 것은 재벌들이 계속 요구해온 것으로 총수의 소유경영독점체제를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재벌개혁은 입법과 제도를 통하여 추진해야 한다. 김당선자는 국회에서 재벌개혁을 위한 법률, 예컨대 「재벌해체 개혁 특별조치법」을 제정해야 한다. 현재 국회의원들의 성향을 봐서 이것이 쉽게 통과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겠지만 김당선자는 여론조사등을 통한 국민의견의 집약으로 국회의원들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IMF구제금융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재벌해체라는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김당선자로서는 중대한 시험에 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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