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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TV대화를 보고…/최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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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TV대화를 보고…/최인호 작가

입력
1998.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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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년전 신문고가 부활한듯/홍보전략 변질안되게 참민의 들었으면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용의 눈물」의 주인공 방원은 1402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새로운 제도를 창안하였다. 대궐밖 문루위에 큰 북 하나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름하여 신문고.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생기면 직접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온 천하에 공고하였고 이 북소리를 들은 왕은 그 사람을 불러 사연을 접수시켜 민의를 정확히 알아보려는 제도였던 것이다. 원래 이 제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개국 이래의 혼란과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 했을 때 신하인 윤조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것으로 비롯됐다.

『송나라의 태조가 등문고를 설치하여 민의를 상달하려 한 제도를 본받도록 하소서』 이 상소를 통해 태종은 구중 궁궐에 머물러 있는 왕이지만 인의 장막에 가려 정확히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폐단을 없애 백성과 임금이 서로 언로가 통하는 일치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일요일 밤, 생방송으로 중계된 김대중당선자의 「국민과의 대화」를 지켜 본 내 머리속에서는 6백년전에 설치되었던 신문고가 부활하여 우리 곁에 나타나 둥둥둥둥­북소리를 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TV 수상기는 현대판 신문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판 신문고인 TV수상기 속에서 당선자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직접 얼굴을 맞대고 질문하고 답변하고, 국민이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면 당선자가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다시 당선자가 이 어려운 시대에 고통을 함께 이기고 힘을 합쳐 나아가자고 설득하면 국민이 공감하여 박수를 치는 모습.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그러나 감동적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지금까지 우리의 대통령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우리의 한표에 의해서 뽑힌 우리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럼에도 당선된 그 순간부터 우리의 대통령은 실종되었다. 뉴스시간에만 잠깐 잠깐씩 나타나는 대통령의 모습들. 자신의 지지자와 부하들, 그리고 먹이사슬의 권력구조속에서, 푸른 기와로 만들어진 현대판 엘바섬에서 스스로 유폐되고 실종되어 반인반수의 유령으로 전락하였다. 한 대통령은 술좌석에서 부하에 의해 총맞아 암살당하고 두 대통령은 푸른 기와의 자폐 감옥에서 해방된 순간 푸른 죄수복을 입고 압송당하였다. 우리가 뽑은 또 하나의 대통령은 아아 슬프다. 그 자랑스런 문민대통령은 5년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분명히 우리가 대통령으로 뽑아주었음에도 대통령은 행방불명되었다. 오리무중이었다. 이제 한달 정도 있으면 그 대통령은 손을 흔들며, 2백원을 집어 넣으면 튀어나오는 자동판매기의 종이컵처럼 미소를 띠면서 나타나겠지.

김대중당선자와 국민과의 대화를 두시간 지켜보고 무엇을 잘했고 못했는지를 논평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당선자는 스스로 현대판 신문고인 TV 수상기 앞에 나타남으로써 「인형의 집」을 나온 것이다. 국민들은 이러한 기회를 통해 유언비어와 소문, 우스개의 익살속에서 인형으로만 존재하던 행방불명의 대통령의 실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파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좋은 제도였던 「신문고」가 나중에는 무고와 사사로운 원한으로 인한 격고로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처럼 모처럼의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도 통치술을 통한 국민의 여론을 조성하는 고도의 홍보전략으로 변질되어 나갈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다. 또 하나는 『권력을 보십시오. 감옥에 가는 것이 권력이 아닙니까. 나는 당대의 인기와 명예에는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재임때보다는 물러간 다음에, 그 보다는 죽은 다음에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런 대통령으로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끝맺음하였던 당선자의 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님.(이 호칭은 그렇게 불러달라니까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만 드리겠습니다. 물러간 다음에도 존경 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이 되셔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아예 잊혀지는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이루려 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인정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진실로 그러할 때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는 국민들의 가슴, 그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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