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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창림사와 안압지(차따라: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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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창림사와 안압지(차따라:36)

입력
1998.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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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자 사발 중 만큼 오랜 우리 차문화 증거/74년 안압지서 발굴… ‘언·정·차’ 세글자 선명/창림사터에선 ‘다연원’ 새겨진 기와조각 나와/‘연못을 바라보며 다를 즐기던 곳’추정지난 74년 신라의 옛 궁궐터 경주 안압지 연못 바닥 뻘속에서 「차」자가 써있는 회색 토기사발이 발견됐다. 이보다 6년전 안압지 부근 창림사터에서는 「다연원」이라는 글자가 써있는 기와조각이 나왔다. 둘다 1,000년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이처럼 오래된 차문화유물은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찾기 드물다. 이 두가지 유물의 발견으로 우리 차인들은 한국 차문화와 역사가 중국에 못지않고 일본보다 깊고 그윽하다는 믿음에 한층 더 자신을 갖게 됐다. 안압지 토기사발과 창림사터 기와조각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차문화유산이라는 주장이 자연스럽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회색 토기사발은 둥근 모양에 굽이 없었다. 학자들은 굽이 있는 받침이 따로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높이 6.5㎝, 입지름 16.4㎝인 사발 바깥에는 먹으로 그려놓은 구름과 꽂무늬가 있었다. 꽃 옆에는 「언」「정」「차」자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써있었다. 「정」자와 「다」자 가운데 위쪽에도 작고 희미한 글씨로 「다」자 하나가 더 있었다.

이 토기사발에 대해 국립경주박물관 고경희 학예연구실장은 그의 논문 <신라 월지 출토 명문연구> 에서 「이 그릇은 정선된 태토를 사용했으나 소성도는 매우 낮다. 그릇의 형태, 글씨, 그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글자 중에 차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차그릇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했다. 월지는 안압지의 옛이름이다. 고실장은 또 이 사발이 당시 진행된 안압지 유물조사에서 출토된 1,600점 토기류 중 유일하게 차와 관련된 유물일 것이라고 밝혔다.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열씨는 이 그릇의 「언·정·다」 세글자는 『차는 정언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옳바른 찻자리는 바른 몸가짐으로 진솔함이 오가야 한다』라는 풀이다.

경주역에서 불국사역으로 가는 큰길을 따라 가면 국립경주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 못 미쳐 왼쪽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인공정원 안압지가 우아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삼국사기는 문무왕 14년(647년)에 이 못을 파, 산을 만들고 진귀한 꽃을 심고 귀한 새들과 짐승들을 길렀다고 전한다. 그후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679년 여러 대궐을 수리하고 월지 주위에 태자를 모시는 동궁을 세웠다. 또 나라의 경사때 잔치를 베푸는 임해전도 지었다. 월지라는 원래 이름이 안압지로 바뀐 것은 신라가 막을 내린 후 찬란했던 궁궐이 없어지고 쓸쓸함만이 남아있는 것을 한탄한 조선조 선비들에 의해서다. 둘레가 1,285m, 4,738평의 크기지만 연못 한모퉁이는 반드시 언덕뒤에 숨겨놓아 어느 위치에서라도 못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게 해 놓았다. 그만큼 연못은 굴곡이 심하다.

(「정」자 옆의 「다」자에 대해서는 다른 말고 있다. 행초서로 쓴 이 글자는 다자가 아니라 영화 「영」자로 봐야한다는 해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차인들은 「말이 정숙하면 영화를 얻는다. 즉 차를 즐겨 마심으로 해서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 한국차학회 고문 김명배씨는 「다」자에 가깝긴 하지만 성급히 결론내리기보다는 시간을 가지고 더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연원」이라 써있는 기와 파편은 지난 68년 신라 최초의 궁궐터였던 창림사터(창림사지) 발굴조사때 「창림사」라 쓰인 기와조각(15∼20㎝ 크기)과 함께 발견됐다. 글자 크기는 가로 세로 2㎝.

창림사터를 찾으려면 포석정을 가야 한다. 포석정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울퉁불퉁한 논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소나무숲 속이 창림사터다. 소나무 숲안에는 높이가 7m나 되는 덩치 큰 삼층석탑과 쌍거북이 조각된 비석받침이 숨어있다. 주위에 개인 묘지가 들어서 언뜻 보면 쌍거북 비석받침은 묘지 장식물로 보인다. 관리소홀 때문이다. 삼층석탑 주위에도 묘가 들어 서 안타까움을 더 해주고 있다.

경주시와 월성군 부근에 촌을 이루고 살았던 여섯부족은 기원전 57년 나라를 세우기로 한다. 이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고허촌장의 양아들 박혁거세를 첫 임금으로 선출한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있는 고허촌장 소벌도리공의 집을 첫 대궐로 사용했다. 그러나 얼마뒤 궁성은 나라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또 소벌도리공 집은 육부촌 남쪽에 지우쳐 있어 여섯촌을 고루 다스리기 불편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에 따라 기원전 37년에 궁궐은 중심지인 양산촌으로 옮기게 됐다. 이 궁궐이 통일신라시대에 아주 없어지자 문성왕 17년(855년) 옛 대궐터에 절을 세우고 창림사라 했다. 지금 남아 있는 돌거북 비석대에는 신라 명필 김생(711∼791)이 썼다는 비문이 있었다. 삼층석탑은 남산에 남아있는 탑중 가장 화려한 탑이다. 지금도 수많은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이 발뿌리에 걷어 차일 정도로 흩어져 있어 큰 절터였음을 짐작케 한다.

김명배씨는 「고려사에 보면 큰 절에 원이라 쓰인 곳은 절에 오는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게 한 곳이라고 되어 있다」며 「안동의 제비원(연비원)이 제비사(연비사)였듯이 다연원은 다연사였을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또한 연못 「연」자로 봐 연못을 내다보며 운치있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집이었을 것이며 두 줄로 새겨놓은 글자 크기로 보아 큰 건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김대성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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