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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모으는 마음(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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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모으는 마음(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8.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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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서는 줄의 길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전국 각지에서는 금을 모으는 창구마다 행렬들이 길다. 이것은 예사로운 도열이 아니다. 전에 없었던 국민정신의 정렬이다. 국난을 피해 달아나는 피난민의 행렬이 아니라 구국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지원병의 행렬이다. 무언의 줄이 이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다.일찍이 배급의 행렬에 익숙했던 우리 국민들이었다. 오늘 우리 국민들은 헌납의 행렬앞에 모여 있다. 바치는 것이 다른 것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금이다.

그 금들이 또한 그냥 한 조각의 쇠붙이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사연들이 금값보다 더 귀한 금붙이들이다. 결혼반지도 있고 행운의 열쇠도 있고 승리의 메달도 있다. 한 개인이나 가정의 기념과 축의와 성공담들을 아낌없이 나라를 위해 내놓는다. 금으로 장식된 모든 영광들을 미련없이 털어버린다. 금이 아무리 번쩍이기로서니 이 애국정성보다 더 번쩍이겠는가.

금은 늘어지는 연성이 금속 가운데서 가장 높다. 1g의 금을 극세선으로 뽑으면 2,800m의 길이까지 된다. 저마다 자그막씩한 금붙이를 손에 든 국민들의 기다란 줄은 금줄을 늘인 것처럼 빛난다.

정말이지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모은 금들인가.

찰리 채플린의 명화 「황금광시대」(원제:The Gold Rush)의 명장면이 생각난다. 19세기말 북미대륙의 북단 알래스카에 금광이 발견되어 미국인들이 그 곳을 향해 달려가던 시대다. 영화속의 부랑자 채플린도 그 중의 하나였다. 눈보라 치는 광야를 헤매다 굶주림에 지친 채플린은 먹을것이 없자 헌 구두 신짝을 식탁에 얹는다. 실크 해트에 모닝 코트를 걸친 신사의 정장차림으로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접시에 담긴 구두짝을 칼질하기 시작한다. 뜯어낸 조각들을 질긴듯이 씹는다. 구두끈은 포크끝으로 스파게티처럼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구두 밑창은 생선 뼈를 발라내듯이 못을 하나하나 뽑아내고 다 먹어치운다. 그 뒤 마침내 금광을 찾아낸 채플린은 큰 부호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오른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내놓는 금붙이들은 바로 이 헌 신짝의 성찬과도 같은 간난의 연대를 정장과도 같은 민족의 의기를 잃지 않고 돌파한 선물이다. 이만큼씩이나마 금조각들이 집안의 장롱속에 들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가난을 이겨냈기 때문이요 그것은 저마다의 금빛 훈장이다. 오늘 이 훈장들을 떼어 나라에 반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유난히 금을 조금씩이라도 퇴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전란의 경험으로 유사시에 대비한 상비약의 필요성에서이기도 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의 지금이 바로 전시요 유사시다. 그래서 너도나도 금들을 내놓는다.

황금을 향한 골드러시의 역사는 많아도 황금을 버리는 역사는 세계사에 드물다. 미국에서 1849년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약 10만명의 이른바 포티나이너(forty­niner)들이 몰려들었을 때 직업인은 직장을 버리고 선원은 배를 버리는 바람에 샌프란시스코만에는 무인선이 500척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직장을 버리지 않기 위해 금을 버린다.

식물이 향일성이라면 사람은 향금성의 동물이다. 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세계가 한국민을 주목하고 있다. 금을 모아서라도 빚을 갚겠다는 한국민의 의지는 IMF나 채권국에 대해 정부의 어떤 보장보다도 신뢰감을 준다.

그리고 IMF공황을 이겨내려면 정부도 기업도 구조조정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국민의식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허황하고 휘황하게 도금된 국민의식이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는 금모으기로 실의의 국민들에게 서로 용기를 북돋우며 민족개조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금을 모으는 마음이면 무슨 마음을 못모으랴.

『금은 사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라는 말이 있다. 금은 한 개인뿐 아니라 한 민족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금은 비활성 금속으로 다른 물질에 의한 화학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영원불변의 물질이라 귀중한 것이다. 금처럼 영원불멸의 찬란한 조국이기 위하여 금을 나라에 바친 민족을 금은 배반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모아 내보낸 금은 언젠가는 다시 일어선 나라의 영광에 씌우는 커다란 금관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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