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Beggars cannot be choosers)」. 영국의 경제전문지인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한국이 외환위기로 「거지신세」로 전락했으며 찬밥 더운밥을 가릴 입장이 아니라고 보도했다.15일 재정경제원과 금융통화위원회가 각각 확정한 방안을 보면 파이낸셜 타임스의 이같은 표현은 비록 기분은 나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적확하게 집어낸 것같다. 재경원과 금통위는 각각 금융기관이 부실화됐을 경우 투자자도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문제에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선 금통위는 이날 부실채권으로 위기에 몰린 제일 서울 등 2개 은행의 자본금을 8,2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줄이라는 감자 명령을 내렸다. 은행자신과 모든 주주들도 경영실패(부실대출)에 따른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반면 재경원은 지난해말 국내 은행들이 외국금융기관에 지고 있는 200억달러 규모의 대외채무에 대한 지급보증 동의안을 국회에서 승인받은데 이어 150억달러를 추가로 승인받기로 했다. 외국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에 빌려준 단기외채를 중·장기외채로 전환해 주면 어떤 경우에도 정부가 외국금융기관에 꼭 갚겠다고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부실대출의 결과를 놓고 내국인인 제일 서울은행에게는 엄중한 책임을 물은 반면 외국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책임을 따지기는 커녕 오히려 정부지급보증이라는 최고의 「면제부」에 덤으로 엄청난 가산금리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미국과 IMF는 마치 가훈처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방지」를 한국에 누누이 강조해왔다. 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추궁하는 등 신상필벌을 해야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금융계는 정작 그들의 판단으로 투자한 실패에 대해선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한채 한국정부에 투자실패를 완전 보상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고금리까지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 하버드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언젠가 『부실 채무자에겐 부실채권자가 있다』며 한국의 금융기관(채무자)과 외국금융기관(채권자)의 공동책임을 지적한 바 있다.
신정권측과 정부의 합동 외채연장협상단이 350억달러규모의 지급보증 동의안을 협상카드 삼아 다음주 미국 뉴욕에서 JP모건 등 채권은행단과 협상을 벌인다. 우리의 입장이 무척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부당한 일까지 무조건 따르는 식의 협상자세는 피해야 한다. 거지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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