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보다 더 무서운 IMF한파에/선택은 잘팔리는 엔터테인먼트뿐/‘번지없는 주막’으로 시작된 대중극 붐에/‘불효자는 웁니다’에 이어/이윤택까지 ‘눈물의 여왕’으로 가세한다위기의 시대다. 문화예술도 생존전략이 필요하게 됐다. 독재정권은 예술의 저항성을 강화시키고 검열은 상징을 풍부하게 했으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국가적 경제난은 예술의 존립 자체에 위기감을 주고 있다.
「저항은 가고 대중의 품으로」. 기로에 처한 예술가의 한 가지 처세는 대중 곁으로 바짝 다가가는 것이다.
연출가 이윤택의 선택이 그것이었다. 그는 최근 「눈물의 여왕」 제작발표회에서 전격적인 「대중주의 선언」을 했다.
『이제 지식연극은 고만 할랍니다. 우리의 연극은 대중보다 지식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새롭고 광활한 곳으로 나아갑니다. 버려진 것을 발굴하고 재구성해 관객과 함께 울고 웃는 그것이야말로 연극 본연의 것입니다. 가장 예술성 높은 대중연극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의 수사는 다소 거칠다. 지식인의 예술과 대중예술의 극단적 이분법이다. 이윤택에 따르면 1930년대 도쿄유학파의 신극이 신파극을 저질로 치부하며 우월감을 획득한 이래 우리 연극사는 지식연극의 승리사였다. 이윤택은 패자의 편에 선다. 「패자 대중주의」.
「대중가극」이라는 규정을 고집하는 「눈물의 여왕」은 50년대 날리던 악극배우 전옥(이혜영 분), 빨치산의 거두 이현상(신구 분), 그를 사로잡은 토벌대장 차일혁(조민기 분) 등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가극이다. 전옥은 탤런트 강효실의 어머니이자 최민수의 외할머니. 전옥의 백조가극단이 빨치산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다시 토벌대의 수중에 넘어가자 토벌대가 빨치산에 총을 겨눈채 함께 가극 「눈 내리는 밤」을 관람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전설같은 사실이 모티프다. 차대장의 아들 차길진씨의 소설 「애정산맥」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피어난 숙명적 사랑과 예술혼을 복합적으로 그린다.
악극, 가극, 신파극 등은 1930년대 폭발적 인기를 누린 대중극이다. 93년 극단가교의 「번지없는 주막」을 효시로 리바이벌붐을 맞은 근대극은 올해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10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막올린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문석봉 연출)는 암표까지 나돌 정도로 관객의 호응이 뜨겁다. 2월엔 또다른 악극 「눈물젖은 두만강」(김상렬 작·연출)이 오른다. 「눈물의 여왕」이 대기업 계열사로서 공연제작에 뛰어든 삼성영상사업단의 첫 창작물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남는 것은 「불황일수록 오락산업만 흥한다」는 통설인가.
자본의 논리에 무장해제된 우리 연극의 제작시스템은 「돈되는 엔터테인먼트」로의 연극계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그동안 기업후원비에 의존해온 공연제작비는 감축되고 관객도 줄어들었다. 대관신청이 없어 대학로의 소극장들이 빈 곳이 많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연극뿐이 아니다. 해외단체의 내한공연은 찾아보기가 어렵고 출판계 역시 마찬가지로 위기에 놓여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제도화해 있는 유럽에 반해 우리의 경제난은 직접적으로 예술의 생산에 영향을 준다.
둘째는 이윤택 개인의 발전사다. 그는 지난해말 노벨상수상자가 발표되면서부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극작가 연출가 배우를 겸했던 다리오 포의 유랑극단식 전통은 전통연희양식을 재현하는 이윤택 자신의 방법론과 맥이 닿았다고 느꼈을 법하다.
반면 「시민 K」 「청부」 「우리시대의 리어왕」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 등의 작품에서 이윤택은 전면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우리 현대의 정치사를 끊임없이 회고하고 지식인의 소명을 내세우는 등 80년대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연극교육이나 조연출 경험, 재정적 후원자 등이 전혀 없이 맨손으로 성장한 이윤택은 지식과 대중의 구분, 즉 시대의 소명과 흥행이란 문제에 오히려 예민했다. 스스로 집요하게 지식인의 과제를 떠안았던 그는 이제 대중의 품으로 귀속을 선언한 것이다.
어려운 때다. 「문화 게릴라」 이윤택은 엔터테이너로 돌아섰다. 삼성영상사업단 역시 품질 좋으면서 잘 팔리는 상품을 택했다. 이윤택이라면 아마도 완성도 높은 대중작품을 만들어 내리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다.
경제위기의 시대. 다른 많은 연극인과 예술가 역시 「어떻게 문화상품을 팔 것인가」를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악극이나 가극 등 복고물은 토종 국산이란 점에서 긍정적인 대중공연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극작·연출가 김상렬은 『5년전부터 악극을 쓰고 연출해 온 점에서 일종의 책임의식을 느낀다. 악극이 과거의 재현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으나 우리에게 호소력 강한 악극의 정서가 남아 있음을 주목해 보라. 연극으로부터 내쫓긴 관객을 되찾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제 여러 장르에서 「예술적인 흥행사」가 탄생할 시기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는가/정부가 명작 후원하고/서민들이 값싸게 관람/미 공황기 FTP정책 선례/우리연극도 거품빼고/혼의 예술로 승부 필요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는가. 흥행성 높은 대중주의를 따르지 않으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한다면 어떤 연극이 남을 수 있을까.
30년대 공황기를 거친 미국은 국가적 지원으로 오히려 진지한 연극작품의 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연극분야의 뉴딜정책이랄 수 있는 고용정책 「페더럴 시어터 프로젝트(Federal Theater Project)」를 1935∼39년 실시했다. 즉 정부가 제작비를 대고 고전 명작을 서민들이 값싸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사업인데 이것은 전국 40개주에서 연 1만명의 고용효과를 냈다.
이 프로젝트로 유명해진 대표적 인물이 오손 웰스. 후에 그의 영화 「시민 케인」은 교과서적 작품으로 유명해졌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발탁된 인물들이 웰스처럼 영화계에도 활발히 진출했다. 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등 코미디나 뮤지컬과는 구분되는 진지하고 비판적인 연극을 형성하는 터전을 마련했다.
물론 30년대 미국의 상황을 90년대 한국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지금은 미국 정부처럼 국가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데다가 연극보다 훨씬 더 값싼 향유대상이 풍부해진 탓이다.
연극평론가 이혜경 국민대 교수는 『이제 다시 「가난한 연극」을 실험할 때』라고 말한다. 『연극계도 거품을 빼고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는 그는 제작비와 교수의 지도 등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 위에 있는 대학연극이 공개되는 것과 배우중심의 소품연극이 올려지는 2가지 대안을 전망했다.
유민영 단국대교수는 『벤처작품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 작지만 아이디어와 땀으로 창조된 충격적인 작품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식민지시대에도 땅 팔고 집 팔아 연극을 했다』며 『우리 연극도 거품을 빼야 한다. 왜 그렇게 작품이 많고 규모는 큰가. 좋은 작품 한편으로 승부하는 예술혼이 살아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실천의 움직임도 있다. 올초 2기동인을 발표한 혜화동1번지 연극실험실의 초저예산 연극이나 여러 장르를 통괄하는 실험극(「레이디 맥베스」 등)들이 그러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김희원 기자>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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