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 노동사무소 르포/“무슨일이든 달라” 절박한 외침/“내일은 희망” 부르튼발도 잊어일자리를 잃었다해서 희망마저 잃을 수는 없다. 혹독한 IMF한파 속에서 절망하거나 주저앉을 여유조차 없는 가장들의 「가정 지키기」 노력이 필사적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찾아나서는 노동부산하 각 지방노동사무소는 힘겨운 「IMF 겨울나기」를 실감케 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12일 상오 서울 구로구 구로5동 관악지방노동사무소. 70평 정도의 2층로비에는 중년의 「아버지」들이 대부분인 50여명이 한자한자 힘주어 구직서류를 작성한 뒤 상담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담원 앞에 앉은 이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절박하고 진지한 표정들이다. 로비 중앙탁자 TV앞에는 5∼6명이 고용보험법과 실업급여 신청절차 안내 비디오를 꼼꼼히 메모해 가며 보고 있었다.
실직이 더이상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 된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예전과 같은 쑥스러움이나 「왕년의 경력」등을 내세우는 허세따위는 없다. 오히려 가정과 가족을 지키기위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당당한 책임감과 의지들이 느껴진다.
구직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정모(48·구로구 구로동)씨는 지난 연말 (주)한보의 핵심간부직에서 해고됐다. 20년간 몸과 마음을 바친 직장에서 쫓겨날 때 손에 쥐어진 것은 6백만원의 해고수당뿐 퇴직금과 체불임금도 아직 받지 못했다. 2주일 뒤부터 지급될 월 1백만원 남짓한 실업급여가 가계소득의 전부여서 대학에 다니는 두딸 생각을 하면 숨이 콱콱 막힌다. 그러나 정씨는 『우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내는 물론, 딸들도 다 이해한다. 어떤 일자리든 잡히는대로 열심히해서 가족들을 지켜나가겠다』고 의지를 내보였다.
이날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구직상담을 한 조모(55·금천구 독산1동)씨는 방직회사에서 20여년간 근무하다 얼마전 해고됐다. 『실업급여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 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조씨는 『나이가 많아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테지만 가장으로서 최선은 다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올들어 이 사무실을 찾는 사람도 폭증, 지난해 하루 1백명에서 최근엔 3백명을 넘고 있다. 고용보험과 정현희(29·여)씨는 『구직자 10명에 일자리는 2개꼴인데다 근무조건이 다른 경우도 많아 어려움들을 겪기도 한다』며 『하지만 다들 강인한 생활의지들을 보여 상담을 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10년전 남편과 사별한 뒤 중소제조업체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다 2개월전 실직한 이모(53·여·금천구 독산동)씨는 취업상담자가 『일용직이라도 괜찮겠느냐』고 묻자 『그거라도 괜찮다』고 반색하고 나섰다. 이씨는 『구직서류만 작성하면 뭐하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 생각에 발이 부르트는 것도 잊는다』고 말했다.
어느덧 사무소의 문이 닫히는 하오 5시. 상담직원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오늘도 일할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은 다시 내일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윤순환 기자>윤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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