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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터(차따라: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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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터(차따라:36)

입력
1998.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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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 이규보가 자주 찾던 ‘대장경 산실’/고려시대 다인 필수품인 차맷돌 3년전 발굴/몽고난 피해 임금모시고 이곳에 살던 이규보가 종종들러 차와 술 즐겨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선원사터. 팔만대장경의 산실이었던 이곳에서 3년전 고려때 것으로 보이는 차맷돌과 청자 찻잔 등이 발굴됐다.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제 부근에 있는 고려말의 차인 백운 이규보(1168∼1241)의 묘소와 함께 선원사터에서도 옛 차인들의 흔적을 한번 더 더듬어볼 수 있게 됐다.

차맷돌은 선원사 주지 성원 스님이 선원사 동쪽 신동산 기슭 우물터 지하 5m에서 파냈다. 맷돌 아랫부분은 없이 윗부분만 발견됐다. 모란꽃이 양각되어 있는 이 맷돌은 지름 30㎝, 높이 20㎝ 크기. 학계에서는 고려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맷돌과 함께 청자잔과 접시도 나왔다.

마을 공동묘지로 변한 이곳은 옛날에는 선원사 경내였다. 발굴된 지점은 물이 고여있는 습지. 부근의 석조물등으로 미루어 원래는 20평 정도의 장방형 연못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우물은 이 연못 옆에 있었다. 선원사가 폐사되면서 우물과 연못은 모두 매몰됐다. 성원스님은 이 차맷돌이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면서 불전에 공양하기 위해 차를 갈던 맷돌일 거라고 보고 있다.

「돌을 쪼아 만든 바퀴같은 맷돌/ 빙빙 돌림에 한팔이 수고롭다/ 그대 어찌 차 마시지 않으리오. 나의 초당에 보내 주었느뇨/ 내 심히 잘 즐기는 줄 알아/ 이것을 나에게 보내준 것이리. 푸르고 향기로운 가루 갈아내니/ 그대의 뜻 더욱 고마워라」

이규보가 차맷돌을 선물받고 쓴 시이다. 누구로 부터 선물을 받았는 지는 알수 없지만 고려때 차맷돌은 차인들의 필수품이었다.

제6대 성종(재위 981∼997)은 임금의 몸으로 불공에 쓸 차를 직접 만들었다. 성종이 덩이차(단다)를 맷돌에 손수 갈고 있는 것을 본 원로 신하 최승로(927∼989)는 「상감이 공덕을 쌓으려고 손수 차를 갈아 정성을 다 하시는데, 이는 부질없는 일로 옥체를 상할까 두렵습니다. 이런 공덕 쌓는 일은 광종때부터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이것은 불가의 인과응보를 그대로 믿는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압니다」는 상소를 올려 임금이 직접 맷돌을 돌리며 차를 가는 것을 말렸다.

최승로의 상소를 보면 4대 광종(재위 949∼975)때 부터 불전에 올리는 차공양을 위해 임금이 직접 맷돌에 차를 갈았음을 알 수 있다. 왕이 그랬으니 하물며 신하나 스님들이야 말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승으로 이름난 진명국사(1199∼1271)가 선원사 초대주지였고 2대 원오국사(1215∼1286) 등 송광사 16국사중 4명이 선원사 주지였다니 이곳에 차맷돌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 었을터.

「내 지금 산가를 찾은 것은/ 술을 마시고자 한 뜻은 아니온데/ 올 때마다 술자리 베푸니/ 얼굴 두꺼운들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스님 인격이 높은 것은/ 오직 향기로운 차 마시기 때문이라/ 장차 몽정의 좋은 차잎을 따서/ 혜산의 물로 차를 달이니/ 차 한 잔에 이야기 한마디/ 점점 현묘한 경지에 들어가니/ 그 즐거움이 진실로 청아 담백하니/ 어찌 술에 혼취할 수 있을까」

이규보의 「방엄사」란 시다.

선원사 주지 성원스님은 이 시에 나오는 「혜산」을 선원사가 있던 도감산으로 본다. 임금을 모시고 몽고난을 피해 강화에서 살던 이규보가 이곳에 자주 들러 차와 술을 즐겼다는 주장이다. 이규보라면 평생을 두고 즐긴 것이 시와 거문고, 술, 그리고 술독을 풀어주는 차였다. 그가 남긴 차시 40여수는 고려의 차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강화 다리를 건너 마니산 참성단과 전등사가 있는 쪽으로 간다. 찬우물고개를 넘어 왼쪽 나지막한 도감산 남쪽에 선원사 터가 보인다. 조선초 이미 페허가 된 선원사는 지난 77년에야 팔만대장경을 만든 자리임이 확인됐다. 사적 259호로 지정된 선원사터는 95년에 가건물이 들어선 이래 지금은 대웅전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선원사는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략을 받자 1236년 강화로 도읍을 옮긴 후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국찰격인 절이다. 고종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도감을 세우고 경판을 만들기 시작, 16년 만인 1251년에 8만장에 이르는 대장경을 완성했다. 대장경은 이곳에 147년 동안 보관됐다가 조선 태조 7년(1398년) 한양 지천사를 거쳐 합천 해인사로 옮겨졌다. 이후 선원사는 흔적조차 없는 폐허로 변했다. 고려말 공민왕때 이곳에 있다가 처형당한 신돈은 선원사의 각종 유물을 우물속에 넣고 죽었으며 그후 공민왕은 선원사를 불태워 버렸다는 말도 전해온다.

「초라한 인가에/ 역사도 끊어진 선원사/ 대장경 만들며 다린 진명국사 다처. 내 여기 차마시고/ 선원사 복원 꿈꾸며/ 차향을 벗 삼는다」

전등사에서 천일 기도를 하다가 선원사 중창의 원을 세웠다는 성원스님의 방은 갖가지 차와 차기가 푸짐하다. 누구에게나 「차 한잔 마시러 오라(끽다래)」이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다입문/유리그릇 이용 가스레인지로 불길조정/찻물 끓여야 제맛/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찻물을 끓일 때는 은은하고 여린 불인 문화로 끓이다가 불꽃이 살아나는 무화로 끓인다. 급작스런 물 끓이기가 아니라, 물이 끓는 상태를 관찰하면서 끓을 때 생기는 기포나, 끓는 소리, 김이 피어나는 모양으로 물 끓는 정도를 측정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찻물을 끓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리 그릇과 가스레인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게눈보다 작은 공기 방울이 점점 자라나 소용돌이 치는 폭풍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유리 주전자는 옛 어른들이 누리지 못한 즐거움을 준다. 불길 조정이 가능한 가스레인지만큼 더 좋은 물 끓이는 화로가 또 있을까.

그 다음에는 보온병을 적극 활용하도록 한다. 요즘 보온과 가열이 되는 물끓이는 전기포트가 있지만, 차생활이 검소함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보면 하루 종일 코드를 꽂아 둔 채 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보온병이라도 물이 식기 때문에 차를 마실 때 알콜램프나 전기포트로 다시 가열하면 운치가 있다. 이때 찬물을 약간 부어 주면, 물의 기운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데 오랜 경험으로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차생활을 하는 차실의 중심은 물을 끓이는 화로였다. 화로가 사라졌으니 어디가 중심인가. 한사람이 찻잔을 따뜻하게 데우는 그 자리가 바로 중심이다. 이 중심을 잡는 것이 차생활이다. 이 세상에 「딱」맞아서 「똑」떨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이 「똑 딱」을 차정신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약간 둘러서 중정 또는 중용이라고 하면 조금은 수긍을 할 것이다. 차생활의 「똑 딱」은 차와 물, 차와 차구, 차와 사람의 어울림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차는 물의 신이고, 물은 차의 몸이라고 하는 체용정신이 나온다. 이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림을 전제로 한 대응이다. 찻물을 끓일 때 물과 불은 분명 대립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물과 불이 어울릴 때 신묘한 찻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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