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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의 전화(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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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대통령의 전화(한국의 추억)

입력
1998.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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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박사,론입니다 한국대사 맡아주세요”/81년 3월 미 바닷가 별장 우리부부와 조동하씨 함께 휴식/갑작스런 백악관전화 받고 세사람 기쁨과 흥분의 도가니/소식들은 김종희씨 첫 축하전화주한 미대사를 향한 나의 여정은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시작됐다. 나와 아내 세니는 80년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진영을 적극 도왔다. 당시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철수 주장과 엉성하기 짝이없는 대아시아정책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우리 주에서 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에 당선된 캐롤 캠벨과 함께 공화당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도 레이건­부시 후보를 위해 뛰었다. 나는 지역신문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기고를 싣는 한편 연설을 통해 레이건 후보를 뽑으라고 호소했다.

많은 공화당 친구들은 내가 대사직에 임명되기 전부터 레이건 행정부에 몸담고 있었다. 지기인 리처드 앨런은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에 지명됐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제자인 리 애트워터도 핵심 참모직을 꿰차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내가 대사로 임명되는데 큰 힘이 됐다.

국무장관에 발탁된 알렉산더 헤이그 장군도 나의 오랜 친구였다. 우리는 그가 미 육사인 웨스트 포인트에서 보병전술을 가르치던 대위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가 됐다. 헤이그장군은 서몬드 의원이 내게 대사자리를 주자고 제안하자 『워커 박사가 원한다면 어떤 자리든 힘껏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부부는 81년 1월20일 거행된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때까지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행정부에서 공직을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3월 중순께 우리 부부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머틀 비치 인근의 바닷가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했다. 우리 부부와 친했던 조동하씨가 바다를 끼고 있는 이 별장에 함께 가기로 했다.

마침내 81년 3월25일 레이건 대통령의 전화가 왔다. 세니는 이날 일을 매우 재미있는 필치로 적어 두었다. 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하는데 대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내 아내도 기쁘게 생각하리라고 믿는다. 아내의 글은 이랬다.

조동하씨와 나는 테니스 경기에서 한세트씩을 따냈다. 3세트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이 브레이크로 승부를 내기로 했고, 조동하씨가 이겼다. 그는 만족해했다. 나도 손님을 제대로 대접한 셈쳤다. 별장에 돌아오는 동안 하늘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3월이었지만 우리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곧바로 별장의 샤워장으로 향했다. 나는 부엌에서 목을 축였다. 남편은 몇발짝 떨어진 식탁에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은 『여보, 당신이 받아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손에는 물잔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부엌벽에 걸린 수화기를 집어 들고 『워커 부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상대방 여자는 매우 쾌활한 목소리로 『네, 워커 부인, 박사님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실례지만 어디시죠』라고 되묻자 그녀는 『예, 여기는 백악관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은 휘둥그래졌고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나는 물잔을 조리대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손에 들려 있는 수화기를 가리키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남편은 의자를 박차고 달려와 내손에서 수화기를 가져갔다. 남편이 차분하게 『워커 박사입니다』라고 말하자 상대방은 『아, 박사님, 죄송합니다. 대통령께서 전화 걸라고 하셨는데 지금 잠깐 나가셨습니다.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물론이죠』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남편에게 달려가 힘껏 끌어안았다. 나는 조동하씨가 들어가있는 샤워장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며 『우리 부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려면 빨리 나오세요』라고 외쳤다. 나와 남편은 서로 싱긋이 웃었다. 조동하씨도 수건을 두른 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머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고 몸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백악관이 지금 막 전화를 걸어왔고 다시 남편에게 전화하기로 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세 사람은 제자리에 선채 벽에 걸린 수화기를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전화가 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갑자기 벨이 울리자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남편은 이번에도 내가 대신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다시 『워커 부인입니다』라고 말했고, 상대방 여자도 다시 남편을 찾았다. 나는 『잠깐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한 뒤 수화기를 남편에게 건넸다. 남편은 내가 엿들을 수 있도록 수화기를 귀에서 살짝 떼었다. 저쪽에서는 『워커 박사. 론(로널드 애칭) 레이건입니다. 오늘 어떠십니까』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빙긋이 웃으며 『좋습니다. 각하께서는 어떠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글쎄요, 나도 괜찮습니다만, 박사께서 내 요청을 받아주신다면 더욱 좋겠는데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대통령 각하, 당신을 돕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겠습니다』라고 되받았다. 그리고 난 뒤 남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워커 박사, 우리 행정부에서 차기 주한 미대사를 맡아주시는데 동의하시겠습니까』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리처드 루이스 워커 박사는 레이건 행정부의 초대 주한 미대사가 됐다.

이 날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한지 단지 8주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활기차면서도 보람찬 새 인생을 출발하는 날이었다. 이처럼 각별한 전화를 받은 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우리는 시부모에 이어 우리 아들 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제프리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앤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 그리고 브래들리는 콜로라도주 파고사 스프링스에 있었다). 그들의 배우자들도 우리와 함께 환호성을 울렸다. 어느만큼 흥분이 가라앉자 다시 벨이 울렸다. 서울에 있는 김종희(81년 7월 사망) 한국화약그룹회장한테 온 전화였다. 그는 남편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전화를 끊은 뒤 우리는 조동하씨를 쳐다보면서 『그런데 김회장이 어떻게 임명사실을 알게 됐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이 잠시 이층에 올라갔을 때 우리 보스에게 전화를 걸었죠. 김회장에게 제일 먼저 여기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김회장이 다시 전화를 건거죠』라고 대답했다. 그가 환한 미소를 머금자 트레이드 마크인 작은 눈에도 미소가 넘쳤다. 우리 모두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어 『이제 뭔가 축하를 해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흥분과 긴장속에서 몇달동안이나 이 전화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서몬드 의원은 남편의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워커 박사, 워싱턴에서는 당신이 우리 행정부의 일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사께서 어떤 자리를 원하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해 남편을 놀라게 했다. 남편은 이에 『그런데 의원님, 저는 지금 교수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리는 바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몬드 의원은 『워커 박사, 당신은 우리 정부에서 찾고 있는 적격자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몇차례 걸려온 통화에서 우리는 레이건 행정부가 남편에게 중국이나 한국 호주 그리고 대만 대사를 맡기면 어떨까하고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백악관에서 전화가 온만큼 조동하씨는 워싱턴으로 떠났다. 대신 우리는 앤(딸)이 사위 윌, 손녀인 브레이든, 메그와 함께 「판자(Plank)」라는 별명이 붙은 우리 별장에 들르겠다는 전갈을 받고 새 손님 맞이 준비에 나섰다. 우리 가족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백번도 넘게 레이건과 남편의 통화내용을 되풀이해 들었다. 우연이지만 나는 레이건이 전화하기전 전화기에 녹음기를 갖다댔었다. 아이들이 집에 온뒤 나는 그들에게 통화내용을 틀어주었다. 녹음기를 두번씩 돌릴 때도 있었다. 두 손녀는 달을 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나는 그때 갑자기 레이건 대통령의 음성 다음에 손녀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녹음기를 틀어놓은채 손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브레이든은 여섯살이었고 메그는 세살 반이었다.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거실로 나와 손녀들과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윌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는 『장모님, 방금 무슨 일을 저지르셨는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말했다. 아차 싶었다.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든 통화내용을 듣고 싶을 때에 대비해 녹음기를 처음 상태로 되감아 놓은 걸 깜빡했던 것이다. 손녀들의 목소리를 넣겠다는 욕심 때문에 대통령과의 통화내용을 지워버렸으니!

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요. 남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남편은 『글쎄, 당초 통화내용을 녹음하지 말았어야 하는건데』라고 말했다. 앤은 『괜찮아요 어머니, 손녀들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게 더 중요할수도 있잖아요』라고 위로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네명의 어른이 최소한 두번이상 들었던 대화내용을 한마디 한마디씩 원상복구하려고 애써 보신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커피테이블 주변 마루바닥에 둘러 앉아 온갖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나 정확한 통화내용에 이견을 보인 부분이 몇군데 있었다. 대통령과 직접 통화한 남편마저 정확히 어떤 용어와 표현이 오갔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 다음날(3월30일)에는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사무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암살기도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뉴스를 별장에서 라디오로 알게됐다. 나는 남편이 그처럼 화가 난 모습을 본적이 없다. 남편은 서둘러 컬럼비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선뜻 이해되지 안는다. 별장에서도 컬럼비아 집에서처럼 언제든 전화통화는 가능했는데 말이다. 남편은 아무튼 자기가 반드시 컬럼비아의 집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3시간동안 운전한 끝에 컬럼비아에 도착했다. 우리는 차안에서도 라디오 방송 하나하나에 귀를 곤두세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워싱턴에 전화를 걸어 암살기도 사건과 관련해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려했다.

암살사건에 얽힌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다. 워싱턴에 도착한 조동하씨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은 뒤 숙소인 워싱턴 시내 파크 호텔로 돌아갔다. 그는 호텔주변의 보안상태가 평소와 달리 삼엄하다고 느꼈지만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다음날 뉴욕으로 날아간 그는 그때서야 대통령에게 총을 쏜 존 힝클리가 바로 그 호텔에 머물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여러해동안 이 이야기를 많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우리는 그리 큰 어려움 없이 한국(대사직)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중국을 택하리라고 기대했다.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펜실베이니아와 예일대 시절부터 중국문제 전문가로 정평이 났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러나 공산국가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며 거부했다. 호주도 비록 많은 친구가 있고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선택에서 제외했다. 한때 캔버라에서 미국 대사와 함께 머무른 적이 있고 호주를 매우 사랑했지만 말이다. 호주는 우리 가족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우리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기뻐하며 참여하셨을텐테!) 우리 부부는 또 30년동안 세차례에 걸쳐 살았던 대만도 사양했다. 우리는 대만 사람들이 오랜 친구인 남편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승인한 미국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대사직을 정말 훌륭히 수행했다. 역대 대사들과의 차별화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국에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새로운 국무(외무)장관과 국방장관, 그리고 각료진이 들어설 상황이었다. 주한 미대사직이라고 새 사람이 들어서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나는 우리 부부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순간을 묘사한 아내의 글을 읽으면서 아내가 81년 여름 서울에서 시작된 우리 부부의 공동임무를 수행하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아내는 정말 훌륭한 연대기 작가였다. 우리 부부는 결혼 36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머틀비치 인근의 「리치필드 바이 더 시」에 있는 별장에 갔던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우리 부부에게 준 기념선물은 참으로 멋진 것이었다!<워커 전 주한 미대사 번역="이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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