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내세울때 아니다”/매주 시험에도 한달이상 기다려야 응시/“아내마저 해고” “두딸 대학등록금 못내”격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던 택시기사직에 지원자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부도와 감원으로 일자리를 잃은 화이트칼라와 가정주부들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밑천이나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택시운전사를 선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한달이상 기다려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낳은 새로운 풍속도이다. 9일 상오 11시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교통회관 로비 대기실. 이날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이 시행하는 택시운전자격 필기시험을 치른 7백여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기실의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평소에는 응시자 대부분이 점퍼차림의 중년남자였으나 이날은 넥타이를 맨 말쑥한 차림의 30, 40대 신사와 깔끔하게 차려입은 주부,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20대 청년 등이 어림잡아 30%는 넘어 보였다.
상장기업의 관리이사였던 김모(45)씨도 이들 가운데 한사람. 기계부품 제조업체였던 회사가 은행의 차입금 상환독촉과 높은 금리를 견디지 못해 지난달 부도가 나자 곧바로 택시운전자격시험원서를 냈다. 『부도전 3개월간 전혀 봉급을 받지못한데다 퇴직금도 기약이 없었다』는 김씨는 『평생 회사만 믿고 일해왔으나 남은 것은 깨진 적금통장뿐』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씨는 『게다가 맞벌이하던 아내마저 두달전 해고통고를 받았다』며 『가게를 낼 돈도 없지만 모험을 하기가 두려워 택시운전사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1남2녀를 둔 주부 김영옥(45·서울 노원구 중계동)씨는 『회사원인 남편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다 두 딸의 대학등록금도 못 낼 형편이어서 용기를 냈다』며 『주변의 친구 여럿도 생활보장책으로 택시운전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에 시간을 냈다』는 자동차부품회사 중역 박모(55)씨는 『회사가 언제 문닫을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퇴직후 해볼 만한 일들을 탐색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평생 관리직으로 일하다가 과연 택시운전일을 해낼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 관계자는 『부도난 기업의 임직원, 주부, 취업을 못한 대학졸업생, 명예퇴직자 등이 최근 대거 몰려드는 바람에 시험을 보려면 한달이상씩 기다려야 한다』며 『응시자의 학력이 높아져 70% 내외였던 필기시험 합격률도 요즘은 87%로 높아졌다』고 말했다. 제1종 보통운전면허증 소지자면 응시할 수 있는 택시운전자격시험은 매주 치러지며 서울시내 주요 도로명과 건물 등의 위치 등을 묻는 1백개항의 필기시험에서 60점이상을 받으면 자격증을 딸 수 있다.<박일근 기자>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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