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씨를 상대로 사정재판이 열리게 됐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사정재판이란 법정관리기업의 정리절차에 앞서 경영책임자에게 회사를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명하는 제도이다. 서울지법 민사 50부가 한보철강 재산보전관리인의 신청을 받아들여 사정재판을 열기로 결정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사정재판은 우선 복잡한 정식 재판절차 없이 빠르고 간편하게 회사를 망하게 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손해배상까지 명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 만하다. 이 제도는 62년 제정된 회사정리법에 규정돼 있으나 그동안 한번도 적용된 일이 없어 이번 결정은 더욱 의미가 있다.
만일 재판부가 신청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배상명령을 내리게 된다면 우리 기업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재판부의 강제조정 성격을 띤 결정에 당사자의 이의가 없으면 1심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지게 되므로 법이 국민 앞에 성큼 다가서는 효력을 발휘한다.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그 때부터 정식재판의 절차가 시작되는 것이어서 재판절차가 그만큼 간소화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큰 의미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깨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사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비용 들이지 않고 간단한 절차로 사주에게서 손해배상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면 회사돈을 빼돌려 자신의 배를 채우는 부도덕한 기업인들에게 경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한보사건 재판결과에 대해 무언가 미흡한 감정을 숨길 수 없던 대다수 국민의 허전한 심사에 한가닥 보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1년전에 터진 한보사건이 지금 우리가 겪는 국난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12월26일의 대법원 항소심 판결로 피고인들의 원심이 확정돼 지금 감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정총회장과 관련 은행장등 5명 뿐이다. 이 재판결과를 보고 어이없어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정총회장의 사유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근거없이 피고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안될 일이다. 그러나 정당한 절차에 따라 받아낸 손해배상금을 어려운 한보철강 살리기에 쓴다면 많은 사람의 허탈감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것이다. 갑자기 언어기능이 상실됐었다는 정총회장은 측근을 면회하면서 『현정권은 힘이 없어 대선이 끝나면 풀려날 것』이라면서 『갖고 있는 것을 좀 쓰라』는 알쏭달쏭한 메모를 써주어 많은 재산을 빼돌린 의혹을 샀다.
한보철강 재산보전관리인 손근석씨는 서울지법에 낸 의견서를 통해 『정총회장은 800억원에 가까운 증여세를 회사돈으로 내고, 회사보증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 590억원을 빌려 써 1,500여억원의 빚을 지게 했으므로 회사는 손해를 배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회사돈으로 증여세를 낸 비도덕적인 행위로 회사 경영을 망치고, 국가경제까지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배상명령으로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