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우리 자동차산업이 미국의 슈퍼 301조 우선협상 대상국으로 지정되는 것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협상의 전 과정을 통해서 미국측의 부당함, 불공정함, 부적절함 등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 미국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국민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이 열화와 같은 분노와 의분을 거의 전혀 모르고 있다.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형적인 여론정치의 나라이다. 정책이란 것이 대부분 여론의 추이를 반영한다. 여론이 나쁘면 아무리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 없고, 반면 여론이 좋으면 봐주고 싶지 않아도 이쪽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봐주는 곳이 미국이다. 여론이 여전히 한국에 대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몇달후의 자동차협상 결과에 대해 전혀 낙관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번 슈퍼301조 지정 협상과정에서 대미언론 대책이 부실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해 우리 정부관리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미국의 언론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전문성과 경험이 필요한데 우리의 현 통상체제로는 그러한 전문성과 경험을 구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론에 우리의 목소리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 전반에 관해서는 물론, 사회 각 부문간의 역학관계, 미국언론의 속성과 운영 방식, 미국 PR회사의 역할 등 다방면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식은 적어도 10년이상의 대미통상에 대한 집중적인 경험과 훈련을 통해 습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지금 정부체제는 그러한 장기간에 걸친 지식과 경험의 습득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지 않다. 통상산업부를 포함한 통상관련 부서는 1년이 멀다하고 보직이 바뀌게 되어있다. 통상문제 1년, 유통산업 1년, 총무 1년 하는 식으로 해서 어떻게 통상전문가가 나올 수 있겠는가.
협상은 고도의 전문분야이다. 일사불란한 논리를 제시하고 속으로는 얼음같은 계산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하고 진솔한 외양을 유지할 줄 아는 능력, 상대방 논리의 허점을 무섭게 파고 들다 필요에 따라서는 작전상 후퇴를 하고 때로는 단호한 분노를 표시함으로써 상대방의 기를 제압하는 협상력이야 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기술이다. 그런데 이 협상력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10년, 20년의 경험과 훈련을 통해 비로소 1명의 원숙한 협상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무역대표부 같은 통상전문기구가 필요하다. 통상을 좋아하고 외국어에 능하고 평생 통상문제에 매달리겠다는 관료들을 한군데로 모아 10년, 20년 「통상」에 전념토록 해줌으로써 협상의 전문가, 통상법의 전문가들을 수십, 수백명씩 탄생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사면에서 통상기구의 독립이 필요하다. 어느 부처의 일부분이 되어서는 소위 순환보직이라는 것 때문에 전문가를 양성할 수 없다.
또 통상기능과 외교기능은 분리시켜야 한다. 외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우호와 선린을 도모하는 일이다. 반면 통상은 한푼 두푼을 가지고 싸우고 다투어야 하는 일이다. 외교와 통상을 한군데 묶어두면 싸워서는 안될 때 싸우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해 질 것이다. 미국과의 협상시 항상 미국 국무부는 우리에게 우호적인데 무역대표부가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은 이러한 역할분담을 통해 국가간의 기본 선린관계는 유지하면서 실익은 챙기겠다는 고도의 전략인 것이다.
무역대표부를 반대하는 논리 중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통상기능을 여러군데로 찢어 놓아야 외국의 공세에 방어하기가 더 쉽다는, 소위 방어논리이다. 즉 상대국이 우리의 어느 곳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지쳐서 적당히 그만 둘 거라는 것이다. 참으로 패배주의적, 소극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부처에 미루고, 모호하게 회피적으로 답변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상대방을 얼마나 약오르게 하고 불신토록 만드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대체로 말을 잘 바꾸고 믿을 수 없고 합리가 잘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상당부분 이러한 상황호도적, 회피적 사고방식에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전시대의 전쟁이 산과 바다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면 세계화시대의 전쟁은 바로 협상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것 아닌가. 통상과 협상의 전문가를 수백, 수천명 양성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국제무대에 나가서 마음껏 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적 장치를 하루 빨리 만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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