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성은 공감하나 노동시장구조 미와 달라 성급한 IMF처방 독될수도 정지작업 완충기간 둬야”정리해고제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국난 극복을 위해 팔을 걷어 붙인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노사정 합의를 사태해결의 최대 관건으로 보고 협상의 귀재인 한광옥씨를 실무대표로 임명했다. 한광옥 대표는 2월 초순 「IMF 국회」가 열리기 전 「합의서」를 만들어내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노사정합의는 정당연합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불안하다. 수순이 거꾸로 되었기 때문이다. 12월의 위기가 지배계층의 것이라면, 1,2월의 생활고는 서민의 것이다. 서민들은 왜 국난위기가 발생했는지, 왜 그것을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그 의문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생활고와 함께 분노로 증폭되고 있는 중이다. 이 마당에 국난극복을 위해 서민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누가 듣겠는가? 노의 동참을 위해서 사와 정의 솔선수범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무언지 서민들은 알고 싶어한다. 서민들을, 노동자들을 사회적 통합의 마당으로 끌어들이려면, 범국민적 「고통의 축제」가 필요하고, 이 축제에 바칠 제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자처할 사람이 있는가?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리해고제가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외국투자자의 유인과 기업회생이 불가능하다고 거듭 말한다. 세계적 투기꾼으로 지목된 소로스도 일침을 놓고 떠났다. IMF사열팀도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맞다고 할 수 밖에. 그러나 그것도 도탄에 빠진 지배계층의 얘기지, 언제 노동자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기업이 잘 나갈 때 노동자들은 항상 뒷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대들의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정리해고제는 꼭 일년 전 노동법개정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전국파업의 불씨였다. 그 불씨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상황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정리해고제의 필요성을 수긍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경제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이다. 급하게 끓인 요리가 맛이 없듯, 급조한 합의서는 한국경제도, DJ정권의 미래도 모두 막다른 길로 안내할 우려가 많다. 정리해고제 시행에는 적어도 반년 정도의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한국의 노동시장은 미국과는 달리 「기업노동시장」이다. 기업이 생계유지와 경력관리의 울타리이다. 기업을 떠나면 타기업으로 쉽사리 옮길 수 있는 구조가 전혀 아니다. 전문직종은 전직이 비교적 쉽지만,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실직은 「인생의 끝」을 의미한다. 대안으로 논의되는 리콜제는 직종간 전직이 열려있는 미국식 「직종노동시장」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둘째, 실직자의 생계를 보전해줄 복지제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취업연한에 따라 2∼6개월 평균임금의 50%정도가 지급되는 고용보험은 아마 재취업을 위한 교통비로 없어질 것이다. 퇴직금도 한 몫에 받기 어려운 요즘의 실정을 감안하면, 해고자들의 눈물겨운 반란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셋째, 노동조합 지도부와 단위노조간의 조율이 어렵다. 협상과정에서 노조지도부가 내놓은 정치·경제개혁패키지가 수용되어 근사한 합의서가 만들어졌다고 치자. 단위노조가 이것을 거부하면 그만이다. 대공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노조지도부는 단위노조위원장들의 분노를 삭일 재간이 없다. 더욱이 IMF백화점 대량세일에 끌려나간 기업이 속속 팔려나가 자본국적이 바뀌는 날에는 단위노조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한꺼번에 폭발할 우려가 많다. 87년 이후 대공장 노조들의 역량은 위기돌파의 파트너로 충분히 성숙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마당에 차기정권이 IMF처방을 따라 정리해고제를 서두르면 오히려 화를 자초할 것이다. 보다 현명한 방법은 경제외교의 채널을 통해 외국투자자들에게 정리해고제 입법을 약속해주는 한편, 그것을 위한 정치적 정지작업에 돌입하는 것이다. 미국식 노동시장이 아닌 한국에서의 조급한 개혁은 오히려 투자자에게 위험함을, 때로는 노동시간과 임금을 양보하고 해고를 최소화하는 노조 주도의 자율적 조치가 투자이윤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일이다. 무엇보다 노동자에게 정리해고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기업이 도산하면 노조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요즘, 정리해고의 폭과 속도를 노사 자율에 맡기는 것이 실무팀의 최대의 목표여야 한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관한한 IMF의 표준처방이 오히려 한국의 활력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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