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파탄이 재벌기업의 무분별한 해외민간자본 차입과 방만한 경영에 큰 책임이 있다는 점은 그간 여론의 무수한 질책을 받은 바 있다. 차기정부에서 경제청문회를 열어 그 원인을 짚어 볼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정부나 정치권, 경제관료, 재벌기업의 어느 쪽에 더 많은 잘못이 있는지는 그때 가면 당연히 가려질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재벌정책을 어떻게 하면 IMF시대에 맞게 조정하느냐 하는 것이 더 급한 과제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국민회의 시무식에서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금지와 결합재무제표 작성 의무화 실시시기를 앞당기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재벌규제 방침을 밝힌 것은 문제의 핵심과 그 시급성을 적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영주에게 기업을 빼앗기는 것처럼 큰 형벌은 없다. 경기침체와 도산으로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나는 실업자가 매일 줄지어 늘어나고, 그들에게는 당장 기업을 망친 경영주가 원망스러울 것이지만, 경영주는 그들대로 아끼던 기업을 잃고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사원들에게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말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 그 책임을 재벌기업주에게만 묻는 것은, 설사 파탄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 아니냐는 항변이 나올 만하다.
우리는 그동안 수출로 먹고 살았다. 그 길만이 살 길이었다. 역대 정부는 수출을 위해 재벌을 정책적으로 육성했고, 재벌기업은 수출의 첨병이라는 자부심 속에 우리 경제를 주도해 왔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가 해외에 나가 제법 큰 기침까지 하면서 지내올 수 있었던 것도 기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한 기업가에게 상당부분 공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과정에서 재벌의 경영조직이 경직돼 사업전망 예측에 실패하고 아편같은 해외자금 꾸어다 계열사 확장과 돈놀이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오늘과 같은 낭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여기에 이른 1차적 원인은 물론 당해 재벌기업에 있다 하더라도, 더 큰 책임은 그렇게까지 가도록 방치하고 조장한 정부의 관리, 감시기능의 태만에 있음이 먼저 지적돼야 마땅하다.
이제는 정부와 기업이 힘을 모을 때다.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활동을 방해해 온 온갖 규제와 법령을 일이 쉽게 풀리는 데 초점을 맞춰 깨끗이 정비해야 하고, 재벌은 전문업종 중심으로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재편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는 사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관행을 깨뜨리고 의식을 전환하는 일이 말같이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IMF의 요구가 아니라도 개방시대 우리 기업이 외국기업에 이겨낼 만큼 강한 체질을 갖추자면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은 재계 스스로도 납득하고 있을 것이다. 김당선자의 당부처럼 정부의 강제조치가 있기에 앞서 재벌기업 자발적 차원의 구조개편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 당당한 세계적 선진기업이 출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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