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살림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께서 맡은 이 나라 살림은 3년이 뭡니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어려운 한심한 형편입니다.국고가 바닥이 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해 11월말 현재 우리나라가 걸머진 외채는 무려 1,569억달러나 된다는데, 우리나라 인구를 4,500만명 정도로 잡으면 1인당 외채가 500만원 가까이 된다는 계산이랍니다. 집집마다 식구가 넷이나 다섯은 되는데 밥벌이를 하는 식구는 한사람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 벌어서 2,000만원 또는 2,500만원의 빚을 갚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저같은 사람이야 부양할 가족이 따로 없고 저 혼자뿐이므로 그 정도의 빚이라면 죽기 전에 갚아버릴 자신이 있지만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제 몫으로 있는 빚을 다 갚고 가기는 어렵겠습니다.
우리 은행도 한둘 외국에 팔아 넘길 수밖에 없겠다는 말이 나돌고 있고, 인수할 은행들의 이름도 차차 밝혀지고 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다다랐는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인데, 이런 딱한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해야 하는 당선자의 고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백성은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는 좋은 세월에 대권을 맡으셨어도 문제가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대통령은 취임하고 나서 가장 골치 아팠던 일이 한자리 달라고 찾아오는 무수한 구직자들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김대중 당선자께서는 71년부터 네 차례나 청와대를 향해 말을 몰았으니, 그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세를 진 분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일단 입은 은혜를 갚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 줄은 압니다마는 작은 감투라도 하나씩 나눠주려 하여도 그 수가 엄청날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이번 대선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영·호남의 심리적 갈등과 대립은 어떤 방법으로 해소하실 수 있겠습니까. 국무위원을 비롯한 요직의 안배를 능력위주로 하지 않고 지역별로 하실 겁니까. 힘이 어느 한 지역에 치우친 것이 지난날의 과오였다고 한다면, 지역이나 또는 거주민의 수효를 염두에 두고 자리를 나누어 주시면 그것은 더 큰 과오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념적 경향이나 성분을 따라 진보와 보수를 적절하게 안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습니다마는 정당을 가지고는 그 사람의 정치적 색깔을 식별하기 어려운 한국적 풍토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는데, 이번에 당선자께서 인사문제를 가지고 말을 쓰시는 것을 보니 확실히 단수가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민주사회에 있어 정당정치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적 상황을 감안하여 정당 위에서, 그 보다는 훨씬 높은 자리에서, 나라의 살림을 꾸려 나가기로 결심하셨다는 느낌이 듭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곳에 따라서는 97%의 절대 지지자가 있는 정치적 발판이 이제는 필요치 않은 새로운 지도자가 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김대중 당선자는 이미 새정치국민회의의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공화당 출신, 민정당 출신을 전혀 가리지 않고 국민회의로 받아들일 때, 그리고 과거 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일하던 악명 높던 사람들도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굳혔습니다. 이제 한국 정치에는 과거가 없습니다.
이것이 민족 도약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겨레가 과거 반세기, 민주주의의 험난한 고지를 향해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부르짖던 민주화니 반독재니 하는 피맺힌 표어들은 이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셈입니다. 민주화가 다 이루어졌기 때문도 아니고 독재의 우려가 전혀 없기 때문도 아니고, 다만 15대 대통령을 탄생케 하는 일이 하도 힘에 겨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해방후 50년에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시기를 비는 마음 뿐입니다.<김동길·전 연세대 교수>김동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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