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패러다임을 바꾸자/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새해를 열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패러다임을 바꾸자/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새해를 열며)

입력
1998.01.03 00:00
0 0

어디를 가나 IMF이야기 뿐이다. 사람들은 땅이 아니라 경제를 디디고 살아간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말은 바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 조상때부터 써온 말이다. 그리고 『장미가 아니라 감자를 노래하라』는 것은 서양의 옛 시인이 남긴 말이다. 먹는 것 앞에서는 「하늘」도 「장미」도 없다. 『그것이 밥 먹여주나』라는 말 한마디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한다. 지금 개인이 그렇고 가정이 그렇고 나라 전체가 그렇다. 그래서 이른바 IMF시대 속에서는 문화의 디딜 땅이 없다.○문화 중요성 인식 부족

그러나 문화의 부재와 파괴가 경제위기보다도 몇 배나 더 무서운 혼란을 낳는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배가 기우는 쪽으로만 사람들이 쏠리게 되면 그 배는 어떻게 되는가. 반드시 뒤집히고 만다. 하지만 균형을 잃지 않는 한 배는 어떤 험한 파도도 능히 이겨 낼 수가 있다. 기우는 배의 그 복원력이야말로 바로 문화가 지니고 있는 가장 소중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터키지방의 한 동굴에서 발굴된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10만년전 인류의 조상 무덤에서는 놀랍게도 매장시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꽃들의 흔적이 다량으로 나온 것이다. 더구나 죽은 자와 함께 묻힌 그 꽃들은 그 근방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로 먼데서 구해 온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위기경제 복원력은 문화

먹지도 못하는 꽃을 왜 네안데르탈인들은 죽음의 장소에까지 가지고 갔을까. 대체 어느 짐승이 꿀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움을 위하여 그렇게 먼 곳의 꽃을 구해 왔단 말인가.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에서 나온 꽃 한송이의 의미는 바로 원숭이로부터 가지치기를 하고 나온 인간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오늘의 이 문명을 만들어낸 문화의 위대한 근원을 보여준다.

인류의 조상은 먹이에 대한 욕망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꽃을 상징으로 사용할 줄 아는 마음과 그 상상력은 원숭이와 달리 하늘을 향해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두 발로 일어서는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위기가 아니라 그 보다 몇 배나 더 심각한 전쟁의 위기 속에서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은 무엇을 했던가.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들으면서 고통을 참고 용기를 내어 자기 가정과 도시를 지켰다.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따지고 보면 베토벤은 그들을 침공하고 있는 바로 그 독일인이 아니었던가.

○국경초월한 보편적 힘

나라의 울타리를 넘어서 유럽이 하나의 연합국가의 형태를 만들어 낸 것도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의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유럽연합의 화폐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이 행사때마다 국가처럼 부르는 노래는 베토벤의 「환희 합창곡」으로 통일되어 있다. 국경을 넘는 문화의 보편적 힘이 무엇인지 우리는 유럽연합의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 실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나토의 같은 회원국인 터키가 유럽연합에서 배제된 것은 그 문화가 그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모든 것은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터키였지만 문화적 뿌리만은 이슬람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까닭이다. 문화는 이렇게 나라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대적인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서 흑백의 이항대립적인 사고로는 대처하지 못하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충돌이냐 융합발전이냐

흔히들 보덜리스 월드(Borderless World)라는 말을 자주 쓴다. 특히 자유시장 경제원리로 보면 이미 이 지구는 영토나 국민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난 지 오래이다. 실제로 지금 세계는 무역 결제액의 천배 가까운 투기자금들이 국경없이 넘나든다. 밀물처럼 몰려오면 한 나라의 경기는 과열되어 거품이 생겨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경기는 하루아침에 시들어 통화위기와 주식폭락의 밑바닥을 헤매게 된다.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닥쳐왔을 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우리가 30, 40년동안 피땀으로 쌓아 올린 경제가 해외 투기자들에 의해 단 2주일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세계는 그 말에 냉담했다. 바로 30, 40년동안 너희들이 쌓아올렸다는 그 피땀 속에는 지금 저주하고 있는 외국 투자가들의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한 나라가 일어서는 것도 망하는 것도 이제는 국경이 사라진 보덜리스의 경제 네트워크속에서 이루어진다.

백마디가 필요 없다. 보덜리스 경제라고 하면서도 그동안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유교자본주의라고 말해오지 않았는가. 아무리 개방체제의 같은 자본주의라고 해도 문화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나온 말이다. 서구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의 문화(종교)원리에 입각한 것이라면 아시아의 자본주의는 유교의 문화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모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경제문제라기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교 문화권 이를테면 「아시안 밸류」의 문화문제로 돌아간다.

○‘국수문화’고집땐 고립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 역시 문화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가 있다. IMF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이냐 혹은 융합발전이냐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의미한다. 세계 언론의 초점도 경제자체가 아니라 서구 대 아시아라는 지역문화의 차이에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화 보편주의와 문화 상대주의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문화 보편주의자들은 세계화할수록 유일 절대의 문화­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자들은 V 나볼의 경우처럼 『서구문화야 말로 세계 어디에서 고통할 수 있는 유일 절대의 보편적 문화』라고 말한다. 클린턴 같은 미국 대통령도 2차 취임식자리에서 그같은 보편주의문화의 승리를 암시하고 있다.

『인류는 지금 처음으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사회에서 사는 사람이 권위주의 독재체제에서 사는 사람보다더 많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선언했다(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32억명, 독재사회에서 살고있는 사람이 26억명의 비율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하티르나 리콴유(이광요) 싱가포르 전 총리같은 사람들은 서구와는 다른 문화­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며 문화란 상대주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제 그런 노선으로 경제와 정치를 이끌어 왔다.

○이분법 사고 더 안통해

결국 이러한 쟁점들에서 생겨난 것이 그 유명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다. 미소 양극의 냉전이 끝난 세계는 앞으로 유럽문화 대 유교­이슬람문화의 대결구도로 변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중국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이슬람문화권과 손을 잡아 유럽 대 비유럽의 충돌이 불가피해 지리라고 내다보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정말 그렇게 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정치­경제패러다임이 앞으로는 문명문화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그 변화자체인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경제문제 역시 문화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의해서 그 해법도 전망도 서게 된다. 국수주의적인 신토불이의 문화관을 고집한다면 세계의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한국은 고립될 수밖에 없고 지금과 같은 통화위기와 경제불황은 그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서구문화를 유일 절대의 보편주의 문화로 섬기는 글로벌리즘에 맹목적으로 패를 던지면 어떻게 되는가. 집토끼를 갑자기 벌판에 내다 놓은 것처럼 금시 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글로컬패러다임 창출을

그것을 종래의 이자 택일적 흑백의 선택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100년전 개화논쟁과 다를게 없다. 상투를 자르는 개화꾼과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었던 수구파의 그 싸움과 다를 것이 없다.

글로벌한 것과 로컬한 것을 동시에 융합한 복합적 「글로컬」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경제를 보는 눈도 자립적이냐 의존적(예속적)이냐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국수와 사대의 두 선택지 밖에 모르던 한국의 문화적 선택이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제3의 길을 찾지 않는 한 경제위기는 바로 문화의 위기로 번져가게 될 것이다. 올해의 시련은 이항대립적 문화론의 상투적 사고를 자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