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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분담’과 ‘고통경감’/이준희 사회부 차장(앞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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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분담’과 ‘고통경감’/이준희 사회부 차장(앞과 뒤)

입력
1998.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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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화두는 자연스럽게 「고통분담」으로 정해진 것 같다.지난 연말 IMF한파가 내습했을 때부터 정치인, 정부당국자, 혹은 기업인과 소시민들까지 하루도 이 말을 되뇌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엊그제 거의 모든 신문의 신년호에서도 이 말은 도처에서 관용어처럼 쓰여졌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말에는 원래 마약과 같은 성질이 있어서 그냥 휩쓸리다보면 자칫 근거없는 당위가 돼버리고 종내는 그 말 안에 갇히기 마련이다.

「고통분담」은 우선 일정량의 고통감당 능력을 전제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흥청망청댔던 것은 도시 중상류 계층이었을 뿐이다. 대부분 일반서민들의 생활이란 그제나 지금이나 별 여유없기는 마찬가지다. 간혹 분위기에 휩쓸려 잠깐 제 처지를 잊었던 일부서민들은 한기가 몸에 닿자마자 화들짝 놀라 잔뜩 움츠러든 상태이다.

고통분담이란 말은 또 공평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만이, 혹은 남보다 더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게되면 더이상 「분담」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한때 「상대적 박탈감」이니 「계층간 위화감」이니 하는 용어가 선진국화한 우리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결코 선진국이 아님이 확인된 이 마당에 이 단어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고통분담은 그 어감이 너무 비관적이다. 왠지 끝이 안보이는 터널속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적어도 고통분담을 운위하려면 그렇게 견뎌야하는 시기와 대가의 크기 등이 함께 제시돼야 한다. 무조건적인, 그리고 기약없는 고통의 요구는 좌절감만 깊게 할 뿐이다.

결국 고통분담은 함부로 국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동안 호시절을 향유했던 이들, 그래서 덜어낼 몫이 있는 계층에서 서로서로에게 해야할 다짐이어야 한다.

대신 정치인, 정부당국자, 기업인들은 국민에게 「고통경감」을 말하고 희망의 프로그램을 약속하라. 애꿎은 소시민들 모두를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인양 몰아가는 지금의 분위기는 정말 온당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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