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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일은 경제위기 어떻게 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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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일은 경제위기 어떻게 넘었나

입력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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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기업 앞장 뼈깎는 구조조정/대공황기땐 공무원임금 삭감 등 정부·국민 똘똘 뭉쳐미국은 1929년 대공황을 맞아 10여년간 경기침체와 고실업 등의 고통을 겪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미정부는 각종 투자유발 정책을 동원하고 금융 노동 사회보장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DR) 대통령이 취임한 1933년은 미국의 경기가 최악이었던 해였다. 루스벨트대통령은 취임즉시 경기회복을 위해 정부가 적극 개입하는 「뉴딜」정책을 선언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첫번째 작업은 경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우선 인출사태를 막기위한 「은행휴일」을 실시하고 의회에 각종 특별법제정을 위한 100일간의 임시회의를 요청했다. 연방공무원의 급여도 대폭 삭감했다. 이어 예금자 보호법을 만들고 긴급구호청(FERA) 민간보호대(CCC) 공공사업청(PWA) 등 각종 기관을 설치해 실업자구제와 정부주도 투자에 나섰다. 유명한 테네시강유역사업도 이때 출범했다.

미 정부는 또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산물생산의 쿼터제를 실시해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막았다. 근로자의 단체협상력을 높이고 노인연금 실업수당 등 사회보장제도도 실시했다.

이같은 적극적 정책에 따라 미국경제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은 증가하고 실업률은 점차 떨어졌다. 하지만 회복세 속에서도 1937년 다시 극심한 불경기가 닥치는 등 기복도 없지 않았다.

경제위기속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계층은 일반서민이었다. 1920년대 급상승하던 생활수준은 급격히 추락했다. 20%를 상회하는 실업률때문에 가장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를 배회했고 좌절감과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도 급증했다. 중산층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교육을 시켰지만 상당수 학생들은 가사를 돕거나 취직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루스벨트 행정부의 강력한 경기부양책과 개혁은 상당수 일반국민의 호응을 받았다. 세계적인 불경기의 여파로 일부 유럽국가들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향해 가는 동안 미국은 정부와 국민의 일체감속에 민주주의를 지키며 서서히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미국은 80년대 또한차례 경제위기를 맞았었다. 무역및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90년대들어 산업 전분야에 걸쳐 경쟁력제고를 위한 구조조정작업을 벌인 끝에 지금은 경쟁력 세계 1위라는 평가를 다시 찾았다.

미국의 경쟁력 강화는 정부보다는 민간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물론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경쟁력제고를 추진했지만 시장경쟁원리에 충실한 미국경제의 특성상 민간기업의 적극적인 참여없이는 불가능한 결과였다.

미국기업들은 우선 다운사이징과 구조조정을 통해 기구와 인원을 감축하는 한편 컴퓨터와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해 생산성제고를 시도했다. 특히 생산현장과 소비자를 컴퓨터로 직접 연결하는 정보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은 비용절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무역대표부 등 정부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공격적 수출전략과 제도권 금융의 전문화, 벤처캐피털의 발달, 노사협력 등도 생산성제고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또 정부 스스로 다운사이징을 실시했으며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항공 통신 금융 등 주요산업의 경쟁을 촉진했다. 일찌감치 클린턴행정부가 추진한 국가정보고속도로 등 정보화사회를 선도하는 정책도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일조하고있다. 이처럼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미국은 불과 5∼6년 사이에 첨단및 서비스산업을 중심으로 한 국가경쟁력을 눈에 띄게 개선했다.<워싱턴=정광철 특파원>

◎노동·복지 대수술 ‘비효율’ 도려내/실업폭동 등 불구 흔들림없이 대처리즘 강력 실천

「황혼의 제국」 영국은 이제 고질적인 「영국병」을 뒤로하고 젊은 선장 토니 블레어 총리와 함께 새로운 자신감으로 21세기를 열고 있다.

불황의 길고 긴 터널은 끝났다. 97년 영국의 실업률은 최근 17년 이래 가장 낮은 5.2%(150만명). 독일과 프랑스의 절반 수준이며, 스페인에 비해서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이자율은 7.2%선에서 안정세를 유지했고, 소비는 최근 10년 이래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유럽단일통화(유러)에 당장 가입하지는 않는다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영국 내 신규투자를 모색하기 위한 해외투자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블레어 총리가 맞고 있는 이같은 전기가 하루이틀에 마련된 것은 아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20여년이 넘게 지속된 침체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뼈를 깎는 고통과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질적인 「영국병」에 과감한 메스를 댄 지도자는 물론 마거릿 대처 전총리였다.

79년 보수당의 대처 총리가 헤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영국은 파산직전의 복지국가였다. 76년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9억달러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은 후 실시한 수세적 긴축정책은 30년대 이래 최악의 경제상황을 호전시키는데 실패했다.「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 슬로건 아래 누적된 비능률과 비효율을 송두리째 뿌리뽑는 혁명적 개혁이 요구됐다.

대처의 첫 개혁대상은 「영국병」의 본산인 노조였다. 복지국가 이념에 따라 성장을 거듭해온 노조는 당시 정권을 수시로 몰아낼 수 있는 수구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기업경쟁력 약화의 주범이었다. 대처는 취임 직후 강성전통의 광산노조와 정면대결을 벌이면서 노조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노동법 개정에 착수했다. 노조의 파업권을 제한하고 기업에서의 파업시위를 금지하는 등 노동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불황에 따른 실업위협은 노조의 저항을 차단하는 최선의 방패였다. 이 결과 영국 노동자의 노조가입률은 79년 50%에서 97년 33%로 급락했다.

전통적 사회보장제도도 축소됐다. 실업자 소득지원제도는 폐지됐다. 대신 구직에 소극적인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구직자 수당제가 신설됐다.

낮은 투자율을 극복하기 위해 외국인들의 직접투자 유치를 위해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기업의 소유주가 내국인이냐 외국인이냐에 따른 세제 등의 차별을 전면 철폐했다. 비효율의 상징인 국영기업의 민영화도 본격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그 때까지 영국산업을 대표해온 조선 자동차 광업 부문이 순식간에 도태했고, 실업률은 81년 현재 집권 초기보다 3배 가까이 증가한 11%대를 넘겼다. 개혁과 개혁에 따른 충격은 보수당 내에서조차 『인플레도 못잡고 실업만 증가했다』는 심각한 반발을 야기했다. 실업사태는 마침내 도시폭동을 야기했다. 대처는 흔들리지 않았다.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이른바 「빅뱅」이라고 불리는 금융부문 개혁에 착수했다. 증시에서 거래수수료의 자유화, 증권사 소유제한 철폐, 업무장벽 폐지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0대 영국 증권사 중 9개가 도산하거나 외국회사에 흡수합병되는 치욕을 겪었다. 아울러 기업간 금융관행에도 대금 신속지급을 골자로 하는 일대 수술을 단행했다.

대처 총리에서부터 97년 존 메이저 총리에 이르기까지 18년간에 걸친 보수당 집권기는 이처럼 개혁과 저항, 신념과 회의가 교차하는 거친 항해와도 같았다. 「대처리즘」은 시행 10여년이 지난 90년대 들어와서야 안정적인 결실기를 맞았다. 블레어 총리의 「신노동당」구호 역시 대처 전총리의 개혁유산을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21세기를 향한 젊은 영국의 활력은 결국 「대처리즘」의 고통을 감내한 결실인 것이다.<장인철 기자>

◎‘오일쇼크’때 민·관 초긴축 물가잡아

국가적인 단합으로 패전을 딛고 일어서 현재 세계 두번째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일본도 그동안 몇번인가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은 70년대 초반 전세계를 엄습한 「오일쇼크」였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오일쇼크는 73년 10월 발생한 제4차 중동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재앙이었다. 당시 석유를 무기화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의 금수·감산정책으로 석유값은 천정부지로 폭등했다.

자원이 거의 없는 국가로 수출에만 의존해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으로서는 그야말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상황이었다. 당장 수출부진으로 인한 국제수지의 적자와 경기침체, 그리고 살인적인 물가인상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때문에 국민과 기업의 불안은 삽시간에 확산됐다.

특히 오일쇼크 직후의 국민들의 혼란은 심각했다. 생활필수품의 품귀를 우려해 나타난 사재기현상이 극심해졌으며 절도범죄도 빈발하는등 사회적으로 패닉현상이 나타났다.

급격한 인플레는 최대의 사회적 불안 요소로 떠올랐다. 당시 일본의 물가는 도매가 31.4%, 소매가 24.5% 상승했다. 그러나 73년 12월22일 발표된 「경제 긴급사태」 선언 이후 일본 사회는 국민과 기업, 정부가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최대 정책목표를 물가안정으로 설정하고 긴축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가를 잡을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국민의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자제 움직임과 기업의 경영합리화 노력이 정부의 시책과 조화돼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이같은 단합된 노력의 결과 75년 도매물가는 3.0%, 소매는 11.8%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성공의 비결은 상호간의 신뢰감이었다. 기업들은 긴축정책의 시행과정에서 경상이익이 급격히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부를 믿고 참아주었다. 상당수 주요 기업들은 불황속에서도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고 함께 일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국민들은 초반의 사재기 소동등을 부끄럽게 여기며 자제하는등 애국심을 발휘했으며 정부와 기업의 방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정부도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 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흔들림없이 추진했다.

오일쇼크라는 위기를 통해 일본은 근본적으로 체질을 개선한 셈이 됐다. 당시 일본의 위기극복 방법을 두고 세계 각국은 「감량경영」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바 있다. 일본의 국민과 기업, 정부는 위기를 통해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슬기롭게 깨우친 것이다.

78년말 이란혁명으로 다시 발생한 「제2차 오일쇼크」를 맞아 세계는 또한번 경악했지만 일본에는 더이상 쇼크가 아니었다. 이때도 국제원유값이 2.4배나 올라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1차 오일쇼크때와 같은 극심한 불황이나 국제수지의 적자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전과 같은 살인적인 인플레도 없었다. 노조의 자제에 따른 물가상승률이하의 낮은 임금인상률과 기업의 합리적인 경영, 에너지 절약정책 등으로 오히려 노동생산성이 향상돼 석유가격의 상승폭을 흡수할 수 있었다.<도쿄=김철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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