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도 문화도 속도를 줄이자/“빨리 빨리만을 외치는 우리시대의 문화오염 이젠 잠시 뒤돌아보자”97년이 저물고 있다. 경제적으로 한순간에 뭉텅 10여년 세월을 빼앗겨 버린 국민의 어깨는 축 처져 있다. 사회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97년을 보내는 문학계의 모습도 우울하다. 이런 판국에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소설가가 있는가 하면 출판사들은 도매상과 서점의 부도위기에 하루하루가 힘들다.
97년을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으면서 짚어봐야 할 우리 문학, 또 그를 포함한 문화의 위상은 어떤 것일까.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고려대 국어교육과)의 산문집 「느림보다 더 느린 빠름」(하늘연못 발행)은 그 위상을 찾기 위한 사유의 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에 따르면 오늘 우리 사회 위기의 근저에는 문화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중국 동한의 사상가 왕충의 말을 빌려 「사리분별이 되지 않거나 잘못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 상태」인 허망한 모습의 한국사회, 그 허망한 모습을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해 주지 못하는 소위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질타한다.
그 바탕은 물론 그의 본업인 문학평론이다. 책 뒷부분에 실린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까지,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보르헤스의 「허구들」까지 국내외 문학작품에 대해 그가 최근 몇년 사이 쓴 짧은 글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의 안내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가 이번 산문집에서 더 힘들여 쓴 글들은 문학을 포함한 우리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전문영역의 신성불가침을 당연시하며 지식과 사회의 맥락을 놓쳐버린 채 「지식 아파트」를 짓고 있는 전문지식인들, 우리 사회의 유일한 실학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마피아 경영학」식의 처세술 서적들의 범람, 싸구려 무협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가 교양과 문화를 대신하는 상스러운 대중문화와 거기 길들여진 문화적 우중…. 이 교수는 우리 문화의 모습을 「문화오염」이란 개념으로 파악하고 거기서 벗어날 것을 절박하게 호소한다. 경제도 문화도 속도에 짓눌려 버린 사회, 정신없이 빨리 가는 것을 즐거워하며 달려가다 발 걸려 넘어지자 또 정신없이 빠르게 자괴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고 그는 말한다.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하는 속도도 베토벤 시대보다 더 빨라진 요즘… 이 세상에는 느려야만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 소중한 것들이 많다… 유전법칙을 발견한 멘델은 아주 심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심심한 수도원에 살면서 수도원 뒤뜰에 완두콩을 심고 그것이 자라는 것을 관찰했다. 완두콩 싹이 자라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려면 얼마나 심심해야 하겠는가』 이 교수의 글은 자칫 우리 문화의 어두운 면만을 비판한 비대중적 글로 읽힐 수도 있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느리게」 되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잠시 속도를 줄이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돌아보자」.<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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