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총체적 위기에 부딪히고 있다. 혹은 말하기를 외환위기라 하고, 혹은 말하기를 경제위기라 한다.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정신을 가다듬고 속을 들여다보면 나라가 기둥째 무너져 내리고 있지않나 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같은 위기에 처해서 우리는 구한말의 우국지사들을 회상하게 된다.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불법적으로 강제되었을 때에 장지연은 「오늘에 목놓아 크게 곡한다」는 글을 썼다. 만일 장지연이 지금 환생을 한다면, 그는 또 한번 「오늘에 목놓아 크게 곡한다」는 글을 쓰지 않을까 싶다.
또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그를 따르는 많은 분들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분들이 왜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왔다. 근본적으로는 지금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번의 사태를 당해서 그분들의 심정을 천분의 일, 혹은 만분의 일 정도는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 사지를 지탱하기가 힘들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늘의 경제위기, 외환위기는 왜 생겼는가. 기업가를 선두로 온 국민이 국제수지를 무시하고 분수에 지나치게 많은 외화를 낭비하여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나라들이 돈을 더 이상 빌려주지 않아 빚을 갚지 못하면 국가부도가 된다고 한다. 실로 한심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밖으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렇게 자초한 것이다.
오늘의 위기를 흔히 IMF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불합리한게 아닌가 생각하는 편이다. 만일 진정 그러하다면 IMF가 손을 떼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정 반대다. IMF가 손을 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IMF에 의하여 오늘의 위기가 빚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흐리게 하고 따라서 그 해결의 길을 막는 것이다. 분명히 오늘의 위기는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밖으로부터 돈을 더 빌려야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돈을 빌리다 보면 장차 더 심각한 고통을 감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래 우리 민족은 저력이 있으므로 능히 이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으리라고들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막연하고 감상적인 민족에 대한 신념만으로는 안된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그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사태의 올바른 진단과 올바른 처방을 필요로 한다.
또 「하면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히 곤란한 말이다. 지금껏 그래서 무모하게 일을 벌였고 무모하게 돈을 빌려다 썼다. 그렇게 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면 된다」는 것은 요컨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저돌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 풍조가 기업가나 정치인만이 아니라 온 국민을 지배하고 있다. 그 지나친 욕망이 화근이 된 것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바라는 욕망 자체를 반드시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지나친 욕망은 죄악의 씨가 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보니 정경유착이 되었고, 부정축재가 생겼다. 오늘의 외환위기는 이 사실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하면 된다」가 아니라 「올바로 하면 올바로 된다」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올바로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에 따른다는 말이다.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원칙이 진리다. 그 진리를 따라야 살 수가 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국민을 향해서 하느님의 말에 순종치 않으면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게 점령되고 백성들은 바빌론에 붙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하리라고 경고하였다. 이 예언은 사실로 나타났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말은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면 진리다. 그 진리에 겸허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산다.
일부 사람들은 민족이 지상이라고 하며 진리를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진리를 어기고 살아남을 민족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대통령도 노동자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회생하려면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원칙인 진리를 존중하고 두려워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한림대 한림과학원 객원교수>한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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