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의 많은 실패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실패는 다음 두가지라고 누군가 농담삼아 말했다. 김대통령은 취임초 『가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얼마후에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두가지가 다 확실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그 말들은 김대통령의 표현력 부족에서 나온 실수였으므로 이제 와서 다시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부도 위기속에 오히려 이득을 보고 있는 많은 부자들, 돈을 꿔달라고 일본에 사정하는 정부를 보니 대통령의 엄포가 생각나 새삼 씁쓸해진다.
외환위기가 알려지자 사회단체들은 너무나 신속하게, 정부의 잘못을 따질 겨를도 없이, 외화모으기 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국민들이 집에 남아있던 달러를 들고 쏟아져 나왔다. 지난 한달간 외환은행에만 53만명이 찾아와 3억2,000만달러를 예금했다.
최근에는 장롱속에 잠자는 금붙이들을 내다 팔자는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반지 목걸이 열쇠등을 모두 금괴로 만들어 수출하면 200억달러 어치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공식외채의 6분의 1, 이번에 받기로 한 IMF등의 구제금융의 3분의 1에 이른다. 이 운동에 호응하여 아이들 돌반지를 들고나오는 사람들 또한 큰 부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금고 깊숙이, 또는 해외 은행에 막대한 외화를 예치하고 있는 부자들 중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환율이 2,000원대로 치솟던 날 수십만달러를 팔러 은행에 나온 사람들이 화제가 됐는데, 그들은 많은 달러를 가진 사람들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지난 한두달 사이 달러가 2배이상 올라 엄청난 이득을 보았고, 국내 금융기관들이 다투어 예금이자를 올리는 바람에 이자 수입 또한 쑥쑥 불어나고 있다.
외화를 움켜쥐고 있는 대기업들도 있다. 한은은 기업들이 보유한 달러가 1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기업들은 수출대금으로 받은 외화를 해외로 빼돌리거나 현찰로 금고에 보관하면서 환차익을 노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기업이 쓰러지고, 한쪽에서는 달러 도피와 사재기로 이득을 챙기고 있다.
부자들은 금융실명제 보완으로 마지막 근심까지 덜었다. 국회 재경위는 지난 26일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무기한 유보하고, 내년 1년동안 무기명 장기채 발행을 허용하는등 금융실명제의 핵심들을 제거했다. 93년 8월 요란한 개혁 깃발아래 단행됐던 금융실명제는 오늘의 경제파탄을 가져온 주범으로 몰려 이빠진 호랑이 꼴이 됐다. 실명제를 겁낼 일이 전혀 없는 대다수의 국민 입장에서는 개혁의 후퇴라는 아쉬움만 남게 됐다.
최근 막대한 외화를 팔아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달러를 은행 대여금고에 보관해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집의 방 하나를 안전장치를 갖춘 금고로 개조하여 현찰을 보관하는 부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실명제를 피해 숨어 있던 돈들이 무기명 장기채로 몰리면 그 돈을 실업자 대책에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부자들에게 결국 백기를 든 실명제를 보는 기분은 착잡하다.
부자를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이 다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것은 아니며, 모두가 낭비와 사치를 일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국가위기를 틈타서 불법적으로 또는 부도덕한 방법으로 이득을 챙기는 것이 아닌 이상 그들이 덕을 본다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중대한 사회문제라는 사실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IMF는 자금지원의 조건으로 정리해고제 즉각 실시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김대중 당선자는 노사정 협의체 구성을 제의하고 고통분담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는데, 결국 가장 절박한 피해자는 실직자들이다. 경제발전의 과실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외화를 낭비한 일도 없고, 생계대책마저 막막한 근로자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내년에 쏟아져 나올 실직자가 1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정부는 재취업을 위한 훈련, 실업수당의 확대등 실직자 대책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국가경제가 어렵더라도 실직자대책은 한시도 미룰 수 없는 문제다. 흔들리는 배를 탄 공동운명체에서 부자들만 휘파람 불어서야 되겠는가. 「흔들리는 배」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써야 한다.<편집위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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