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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께 드립니다(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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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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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테니스나 탁구나 배구가 다 그런 경기입니다. 달리기도 수영도 스키도 승마도 모두 그렇습니다.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승자에게는 꽃다발이 가고 특히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면 월계관이 주어집니다.선거에도 패자가 있고 승자가 있는 법입니다. 초등학교의 반장 선거도 그렇습니다. 지역의 국회의원 선거도 그렇습니다. 대통령 선거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회창은 패자이고 김대중은 승자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15대 대통령선거를 지켜본 뒤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만은 승패를 갈라놓는 선이 분명치가 않습니다. 김대중 당선자는 승자인 동시에 패자이고, 패자인 동시에 승자입니다. 제가 하는 이런 말을 김당선자와 그 측근에 있는 분들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저를 멀리하거나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이제 다 늙은 이 몸을 앞으로 괴롭히기야 하겠습니까마는 14대 대통령 당선자는 속이 좁아서 그랬는지 『오로지 대통령이 되어보겠다는 야심 하나 때문에 3당을 통합하여 여야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장본인이 무슨 훌륭한 대통령이 되겠는가』라고 겁없이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그후 저의 말이나 글은 신문에 나지도 못했고 저의 얼굴은 TV에 비치지도 못했습니다. 그뿐이었습니까. 제가 속해있던 정당 하나는 박살이 나고 원내교섭단체도 무너져 정처 없이 헤매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엄연히 승자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당선자가 승자로 자부해선 안된다는 말씀을 왜 드리는가, 그 까닭을 좀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운동시합이 다 승자를 내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당선자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권투나 축구에도 무승부가 있습니다. 선거에서는 아무리 그 실력이 막상막하라 해도 비겼다고 할 수는 없고 반드시 판정으로라도 승패를 가려야 하는데 이번 대선이 바로 그런 선거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4,000만 동포를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40만은 그 100분의 1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근소한 표차가 아닙니까.

이번 선거의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팽팽하게 맞서 있고, 동쪽과 서쪽이 또한 팽팽하게 맞서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15대 대선을 통해, 의식주의 문제만은 걱정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크게 반성할 필요가 있고, 어느 때에나 영남이 호남을 누를 수 있다고 믿어온 사람들이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교만을 뉘우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국고가 바닥이 나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지만 김대중 정부의 새로운 출범은 21세기 태평양시대를 주도해야 할 한반도의 위상을 제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못하시면 반세기에 걸친 「나라사랑」의 큰 뜻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야당생활 40년이 결국 면목 없는 부끄러운 세월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전 박정희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의 칼날에 서슬이 퍼렇던 그 어느 날, 지금은 자취를 감춘 「다리」라는 반체제 잡지를 위해 저희 집 다락에서 중앙정보부 몰래 대담을 하고 그 내용이 그 잡지에 실렸기 때문에 불려다니며 고생하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때에는 선생께서도 매우 젊었고 저도 견딜만했는데, 『오호라 나 이제 늙었으니 이것이 그 누구의 잘못인고』라고 탄식한 주희의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10여년전에 세 김씨에게 함께 낚시나 가시라고 권했던 저로서는 3김이 줄줄이 대통령도 되고 국무총리도 되는 이 역사의 현실이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퇴장을 앞둔 14대 김씨 대통령의 5년 통치를 지켜보면서는 「내 말대로 낚시 갔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넋두리를 여러번 되풀이했습니다.

한 시대의 풍운아는 이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저는 계속 권력자가 싫어하는 말이나 하고 글이나 쓰는 한 「고달픈 논객」으로 끝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언제나 같이 하시기를 빕니다.<김동길·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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