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비주류음악의 공식데뷔를 선언한 이후/한국재즈를 지킨다는 오기로 버텨온 ‘20년 세월’「Janus Since 1978(야누스,1978년 창립)」.
재즈 클럽 「야누스」의 무대 전면 상단에 커다랗게 내걸려 있는 문구다. 저 짤막한 한 마디에는 비주류의 음악, 재즈의 이름 아래 격동의 현대사를 헤치고 살아남은 자들의 안도와 기쁨, 그리고 때로는 슬픔이 농축돼 있다.
창립 이래 매월 첫째 일요일에 꼬박꼬박 지켜 온 「야누스」의 월례 정기연주회가 98년 1월4일로 200회를 맞는다. 창립 19주년만에 벌어지는 일이다.
페스티벌이 아닌, 클럽 정기연주회라는 개념은 사실 세계 어느 재즈클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에게 재즈란 언제나 살아 숨쉬는 생활이므로, 일일이 숫자를 챙겨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누스」의 200이란 숫자는 「이번만은 빠뜨릴 수 없어…」하는 오기가 쌓여 이뤄낸 축적물이다.
90년대 들이닥친 재즈붐 덕에 재즈를 내건 클럽이 무수히 양산됐다. 그러나 재즈를 위한 클럽은 뜻밖에도 많지 않다. 음악으로서의 재즈가 아닌 재즈적인 이미지를 그럴싸하게 차용하는 데서 그치기 때문이다.
청담동 「야누스」를 비롯, 이대 뒤 「버드랜드」, 대학로「천년동안도」, 이태원 「올 댓 재즈」, 반포 「버드랜드」, 청담동 「카멜롯 인 서울」 등이 진짜 재즈클럽으로 꼽히는 실정.
『발끝에 차이는 재즈클럽이란 데에 가 보면 록, 블루스, 가요 일색이다. 퇴촌일원 강변, 장흥 등 서울 근교 유흥지에도 「재즈 카페」는 뒤를 잇고 있지만 그런 데서 나오는 음악은 록』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진단. 이같은 재즈 클럽 바람은 순국산 재즈 클럽 제 1호 「야누스」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78년. 남북대화의 창구가 완전 폐쇄되고 박정희씨가 9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실시된 때. 한쪽으로는 「새마을 운동가」가,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동백아가씨」나 「해변으로 가요」가 대중의 의식을 반반씩 점령하고 있던 때.
소수 음악인들의 개인적 관심에만 머물렀던 비공식 하위문화(subculture) 재즈가 처음으로 둥지를 틀어 일반에게 문 연 곳이 이대앞 시장바닥의 「야누스」다. 김수열 이판근 등 국산 재즈맨 제1세대와 음대출신의 박성연씨가 주축이 됐다. 27평짜리 썰렁한 화실을 개조한 곳, 친구한테 50만원을 빌려 얻은 셋집이었다. 「야누스」에 가면 재즈라는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미술·문학·연극 등 예술계 동료들이 있었다. 「극단 76」, 극단 「산울림」, 오태석씨 등 발랄한 연극·예술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던 처소였다. 『고차원 예술, 재즈를 들을 수 있다』. 머잖아 입선전을 거쳐 서울에 있는 외국인 인텔리들도 모여 들기 시작했다.
산수이(Sansui) 진공관 앰프에다 보스(Bose) 스피커 등 재즈 감상을 위한 최적의 하드웨어, LP 700여장 등 박씨의 소장품은 재즈만의 풍성한 울림을 자아냈다. 집들이 잔치까지도 즐길 수 있는 그곳은 그대로 「70년대의 밀다원」이었다. 그러던 「야누스」를 대학로로 내몬 것은 집세 인상이었다. 86년부터 10년 간의 대학로 「야누스」 시대는 그렇게 피난가듯 시작했다.
창고를 개조한 70평 널찍한 공간에 라이브 재즈를 즐기러 젊은층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학로에서 맞닥뜨린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이에 발맞춰출연진도 대폭 쇄신됐다. 임인건 이영경 박지혁 차현 안기정 등 요즘 낯익은 참신한 인재들에게 문호가 열렸다.
그러나 현실에서 재즈는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음악. 대학로에서 살림을 거의 거덜내다시피 한 그는 96년 이화여대 후문으로 옮겨갔다. 127평이라는 거대한 공간에다 화려한 실내는 재즈가 아니라 팝에 어울리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대중가수를 무대에 세우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지난 5월, 그는 큰 바람 쐬는 기분으로 무대를 강남으로 옮겼다. 청담동 80평짜리 지하, 110석 규모의 네번째 「야누스」다.
요즘 그는 20년 동안 축적된 경험을 작품으로 다듬어 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출연진을 바꿔가며 라이브 무대를 갖는다. 내옷처럼 편안한 동년배뿐만 아니라 재기발랄한 후배 재즈맨의 연주에도 호흡을 맞춰본다. 두터운 역사를 기반으로 새 시대의 어법을 모색해 가는 「상설 재즈 시험장」인 것이다. 신·구 어법이 서로 삼투하는 식의 재즈 무대라는 점 역시 커다란 특징.
월·수·목요일은 오랜 세월의 동반자 「수퍼 트리오」와의 편안한 무대(피아노 신관웅, 베이스 장응규, 드럼 김희현), 화·토요일은 신예 「야타밴드」와의 실험적 무대(피아노 임인건, 기타 정재열, 드럼 벤 볼, 베이스 전성식). 또 금요일은 「방병조 퀸텟」과 「박지혁 트리오」가 함께 나온다. 일요일은 피아니스트 노명석의 발라드 연주가 한 주를 매듭짓는다. (매일 하오 8시30분, 9시40분 (02)5469774)
청담동으로 오면서 주요 고객층이 30대 이상의 중장년층으로 옮았다. 원숙을 찾아 매일 실험을 벌여가는 야누스의 노선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금 청담동 「야누스」의 한쪽 벽에는 신촌 「야누스」의 역사가 살아 있다. 음향기기며 음반 등은 출발 때의 것들.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도 박씨는 그것들만은 놓지 않았다. 세월이 스며든 블랙 커피향처럼, 그것들은 「야누스」를 잘 숙성된 중저음으로 감싸 안는다.
98년 1월4일 하오 5시에 벌어지는 200회 연주회의 출연자는 이동기(앨토 색스), 강대관·최선배(트럼펫), 김기철·홍종민(테너 색스), 안기승(드럼), 박지혁(기타), 전성식(베이스), 임미정(피아노). 중견과 신진의 합작 무대다. 박씨의 유명한 「물안개」도 그날 들을 수 있다.<장병욱 기자>장병욱>
◎야누스만의 음악공간 확보가 문제/오르는 임대료에 4곳 전전/신인출연땐 무대가 썰렁
역시 돈이 가장 큰 문제다.
시도때도 없이 오르는 건물임대료는 「진짜 우리 공간」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일깨워 주는 계기다. 앞으로 계속 고민해 나가야 할 대목이다.
얼마 되지 않는 재즈맨들이 다른 일감, 주로 방송의 쇼 프로 일에 쫓겨 재즈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 하는 모습을 볼 때 치미는 안타까움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젊은 연주인이 출연하는 시간이면 관객이 더 준다. 아직 유명세를 타지 못해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만, 신인의 등장을 지켜보는 기쁨을 우리 관객은 모른다. 「야타 밴드」의 썰렁한 무대가 그같은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훌륭한 그룹이 연중무휴로 설 수 있는 상설무대라는 점에서 「야누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매일 매일 뮤지션을 바꾸고 편성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자랑이다.
재즈 자체가 음지에 머물렀던 시절이 대부분이었던 「야누스」의 좋았던 시간은 화려하지 않다. 주위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고 박씨는 기억한다. 신촌의 시장바닥 시절, 크리스마스 때 상인들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돈까스 파티를 열어 줬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놀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아이들에게는 야누스의 계단은 언제나 훌륭한 놀이터였다.
대학로 시절, 자정을 넘겨 이미 문을 닫았으나 두 청년이 어디에선가 싱싱한 튤립을 구해와서는 방금 딴 운전면허증에 싸인해 달라고 했을 때를 그는 잊을 수 없다.
요즘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그와 「수퍼 트리오」의 협연무대다. 객석의 반응도 좋아 현재 출반대비용으로 9곡을 녹음해 둔 상태. 보다 정제된 한국 재즈를 야누스는 오늘도 꿈꾼다.<장병욱 기자>장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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