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언젠가 3번의 대권 낙방에 대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대선을 바라보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회창 한나라당후보의 아들 병역문제가 없었다면, 아니 이 문제가 경선과정에서 제기되어 걸러졌다면 대선은 전혀 다른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후보결정 이후 터져나옴으로써 여당은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이 대선의 톤을 결정했다. 게다가 이회창 후보는 경선과정에서 영남후보 필승론을 누르고 승리, 대선을 영남후보 없는 선거로 만들어줌으로써 김대중 총재로서는 「손 안대고 코 푼 격」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의 사태 전개만 해도 그렇다. 결정적인 위기 때마다 하늘은 그를 구해주었다. 예를 들어 이회창후보의 인기가 급격히 회복세를 보여 김총재와 각축전을 벌이자 국제통화기금(IMF)사태가 터져 그를 구해주었다.카오스이론 등이 보여주듯이 최근 학계에는 자연현상의 법칙성을 찾아내 예측력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하던 과거의 결정론적인 과학관에 대한 자기비판과 함께 우연성과 미확정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부상하고 있다. 이번 대선 역시 바로 이같은 우발적 사건과 우연의 중요성을, 따라서 한국정치의 카오스이론의 필요성을 보여준 셈이다.
어쨌든 김총재의 승리는 한국정치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일상적인 통념과 달리 이번 대선이 한국정치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4·19, 5·16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그것들이 평화적 방식에 의한 정권교체가 아니었으며 이번 대선을 통해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즉 평화적인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역차별과 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출신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회창후보의 경선승리로 37년간의 영남대통령시대는 어차피 끝나고 누가 이기든 「백제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호남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오랜 한이 풀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빛과 그림자라는 양면이 있듯이 이번 대선이 밝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 대통령당선자의 승리로 우리는 21세기까지 「3김정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공약으로 내건 내각제가 관철되는 경우 3김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 지 아무도 모르게 될 것이다. 또 영남패권주의는 깨졌다고 하지만 지역주의, 지역할거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97.3%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에서 11%대까지 떨어지는 김총재의 지역별 득표율의 엄청난 격차가 보여주듯이 이번 대선 역시 동서대결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같은 대선결과의 양면성중 긍정적인 것들을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극소화하느냐는 것이다. 우선 민주화와 개혁을 가속화해야 한다. 정권교체는 민주화를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다시 말해 정권교체가 새로운 「문민독재」와 「문민황제」를 의미한다면 정권교체로서의 의미가 전혀 없다. 그리고 김영삼정권 덕분에 개혁이란 말이 이제는 저주의 단어가 되어 버렸지만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는 개혁이다. 김정권의 실패는 개혁을 과도하게 추진한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민주화와 개혁이 대선결과의 긍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하는 방안이라면 3김정치의 핵심인 가신정치, 전근대적 사당정치를 발본적으로 민주화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적 측면을 극소화하는 길이다. 3김이란 특정한 정치인들이 아니라 그들이 구사해온 3김적 정치행태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같은 낡은 행태의 혁파를 동반하지 않은 집권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는 김영삼정권이 잘 보여준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경제위기의 극복등 어려운 과제들을 여소야대와 자민련과의 권력분점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정치적 조건하에서 수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를 김영삼 대통령처럼 정도가 아니라 정치9단의 정치공학과 잔머리로 해결해가려고 해서는 결코 안된다. 우선 선거 말기에 약속한 거국내각 구성과 자민련과의 50대 50 권력분점이라는 모순된 약속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에서부터 낡은 「말바꾸기」수법이 아니라 원칙있는 해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했을때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은 것이 아니라 문제는 이제부터」라는 지적을 개인적으로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문제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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