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전 주한 미 대사 회고록/모윤숙씨 별장서 보낸 하루/한국문화 이해 소중한 기회/우리부부는 함께간 조동하씨 부부와 어울려/모여사 시를 듣기도하고 소주잔에 한담을 즐기며/인간관계·체면을 중시하는 그들에 깊은 인상받아인생을 살다보면 가끔씩은 판에 박힌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중한 사건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하다. 이런 행동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이질적인 문화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고충이나 가족문제에 대해서도 배려할 줄 알아야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의 생활 양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69년 아내 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이같은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갓 창설된 통일원(NUB)이 주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렀다. 그런데 하루는 조동하씨 부부와 함께 청평 호수에 놀러갈 기회가 생겼다. 우리 부부는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인 모윤숙(90년 6월7일 사망) 여사의 별장에도 들를 수 있었다. 호숫가에 있는 모여사의 별장은 작지만 전원미 넘치는 오두막집이었다. 모여사의 딸인 서니 류(안경선)는 조동하씨의 부인인 마거릿(나은실)의 동창이자 각별한 친구였다.
그 시절에는 차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로 청평 호수에 있는 댐까지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청평댐은 일제시대때 지어진 구식 수력발전소였지만 당시에도 작동됐다. 한국전때 피해를 입었던 이 댐은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전후 복구됐다.
당시 한국의 몇몇 지도급 인사들은 청평 호수 주변에 작은 별장을 갖고 있었다. 별장은 대부분 호숫가에 지어졌다. 그러나 별장까지 이르는 도로는 없었기 때문에 별장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일종의 모험인 셈이었다.
60년대만해도 청평은 때 묻지 않은 채 시골 마을의 풍치가 넘쳤다. 모여사 별장에 가는 길도 작은 모터 보트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트는 6인승이었으며 별장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이 보트는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가솔린 모터의 성능은 꽤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호수를 따라 한참을 올라간 뒤 모여사 별장앞에 있는 선착장에 당도했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모여사는 우리 일행에게 한국 음식을 내놓았다. 우리는 냉면을 먹었는 데, 나중에 한국 사람들이 점심으로 냉면을 즐겨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음식들도 많았다. 김치는 물론이고 빈대떡과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잡채도 나왔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뒤 가벼운 산책에 나섰다. 포장된 길은 없었고 오솔길과 언덕만이 이어졌다. 우리가 청평을 방문한 때는 마침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였다. 산과 들판을 수놓은 단풍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호숫가 별장에 앉아 가족과 친구 문제, 그리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여사는 우리에게 자신이 지은 시들을 읊어주었다. 우리가 모여사의 시에 담긴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동하씨 부부가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서니는 모여사의 시를 훌륭하게 번역해주었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마거릿이 끼여들어 『아니야, 내 생각에는 뜻을 제대로 전달한 것 같지 않은데』라고 말했다. 그럴때마다 서니와 마거릿은 시어의 정확한 해석을 둘러싸고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조동하씨는 미소를 띤 채 두 사람의 토론을 멀찌감치 지켜보면서 내게 맥주 한잔을 더 권했다.
모여사 별장 방문은 내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적 차이점들을 극복하는 계기를 제공한 또다른 의미도 있었다. 이런 표면적인 차이점들은 서로의 문화를 구별시켜 주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많은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주었다.
한국 여성들도 여느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십(한담)을 즐긴다. 그들은 낄낄대며 웃기를 좋아하고 친구들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최신의 토픽들을 서로 교환한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이들과 가정에 관한 고민들을 서로 털어놓으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인 특성인 것 같다. 사람들은 또 주변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일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교환함으로써 상대방을 즐겁게 해준다.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 민족이 대단히 격조높은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인들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결점에 관한 유머를 즐기며 웃음을 나눈다. 우리는 또 한국 여성들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손바닥으로 자신들의 넓적다리를 치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실제로 소풍이나 모임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노년층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다 무릎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때로는 외설스런 농담을 하면서, 때로는 재미있는 가십을 주고 받으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이같은 모습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69년의 청평 방문은 내가 한국 사람들의 정말 독특한 행동 양식을 처음으로 접한 자리였다. 우리는 마거릿과 서니라는 뛰어난 통역자를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엇이 재미있고 어떤 사안이 흥미를 끌고 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마거릿은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는 데 우리 모두는 그녀가 (업무와 관련해서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존중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업무와 관계되는 질문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시의 정치성 가십에 관해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 몇해전인 66년 9월 한국 국회에서 벌어졌던 한 사건을 놓고 파안대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를 초대했던 사람들은 나와 세니가 그 사건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에피소드를 꺼냈다. 야당인 한독당 소속의 한 의원(김두한)이 정부의 행태에 분노한 나머지 오물(소똥거름)이 가득한 그릇을 국회에 들고가 바닥에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이 싫어했던 일부 의원들에게 소똥거름을 뒤집어 씌웠다. 그는 『이게 바로 당신들이 토의하는 내용이다. 당신들은 지금 시골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소리질렀다.
우리와 함께 있던 한국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했다. 그들은 또 우리 부부도 이 에피소드에 담긴 뜻을 알고 재미있어 했는지 궁금해했다. 이처럼 우리 부부는 청평 첫 나들이에서 한국인들의 관심사와 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실컷 들었다.
몇시간이나 가십을 즐긴 뒤 자연스레 한국의 곡주인 소주를 마시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모여사는 소주를 딱 한 잔만 마셨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몇 잔씩을 들이켰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술을 마시는 동안 어느덧 나른한 늦은 오후가 됐다. 술기운이 돌면서 졸음이 쏟아지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모여사는 온돌방에 요를 깔아주었고 나와 아내는 그 자리에 누웠다.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몸이 풀린 우리는 곱게 수놓여진 이불안에서 편안히 발을 뻗었다. 그리고 꽤 오래 단잠을 잤다.
우리 부부가 온돌 바닥에서 자본 경험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온돌은 한국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요즘에도 몇몇 고층아파트 주민들이 일부러 온돌을 갖추고 사는 모습을 보고는 흥미롭게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거나 온돌의 따스함을 느끼며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어찌됐든 한국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한숨을 자고난 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인간 관계를 둘러싼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미국의 여느 조그만 마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한국 친구들은 이데올로기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 미국인들 끼리의 대화에서 종종 끼게 마련이었던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 대해서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는 모든 게 인격화하는 등 유교적 전통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관계와 서로의 체면을 살려주는 행동이 다른 무엇보다 훨씬 중요한 덕목이다.
서구인들은 한국 민족이 다소 감정에 치우친 문화를 갖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이는 일면 일리가 있다. 한국인들은 기쁨이나 슬픔에 관한 감정을 매우 자유롭게 표현한다. 한국 사람들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 때도 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때문에 종종 한국 사람들은 생각하는 바를 기탄없이 말하는 민족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러나 이같은 평가는 어디까지나 미국식 또는 서구식 기준에서 내려진 판단일 따름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종종 어떤 개인의 행동과 특성, 그리고 대인 관계를 대화의 중심에 놓기도 한다.
한국인들의 이런 특성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과 서구인들은 흔히 계약을 할 때 법적 절차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망각하곤 하는 데, 한국에서는 이럴 경우 낭패를 보기 쉽다. 한국 사람들과는 달리 서구인들은 매사에 있어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무심코 지나치곤 한다. 나는 이런 특성들을 한국에서 몇년 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때문에 사업차 한국을 찾은 미국 친구들에게 한국에서는 사업에 뛰어들기 전에 반드시 인간적인 신뢰를 먼저 쌓아야한다는 경고성 충고를 해주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상대방이 인간 관계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관점에서 상대방의 능력과 가치를 평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모여사 별장을 방문하면서 (한국 친구들과) 이처럼 소중한 인간관계를 쌓게 됐다고 생각한다.
좀 더 한담을 나누고 나자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 조동하씨와 나는 시원한 맥주를 좋아했다. 그 시절에는 한국에서 OB와 크라운등 두가지 브랜드밖에 없었다. 우리는 한국식 바비큐인 불고기에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저녁식사후 우리는 모여사 가족에게 감사를 표한 뒤 선착장으로 가 보트에 올랐다. 그리고 조동하씨의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조씨의 차는 너무 작았기 때문에 우리 세사람은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야했다. 뒷좌석에서 우리는 1시간 반동안 꾸벅 꾸벅 졸다가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청평 호수를 여행하면서 많은 인상을 받았다. 첫째, 나는 청평 나들이를 통해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나의 믿음을 재확인했다. 둘째, 청평 나들이는 내게 서울에서의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했다. 청평을 방문하면서 나는 한국 사람들이 놀러 갔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관찰했는데 그들은 일단 일상사를 떠나면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한국 사람들은 확실히 자연과 아름다운 경치를 음미할 줄 아는 민족이다. 한반도는 금수강산으로 축복받은 땅이다. 나는 산림녹화사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미국인들은 식목일날 멀쩡한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과 산으로 나가 나무를 심어야한다는 사실에 존경심마저 가졌다. 한국 민족은 한 목소리가 돼서 산에 나무를 심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자부심을 갖고 나무를 심었다. 이같은 산림녹화사업에 힘입어 80년대까지 한국의 많은 야산들은 우거졌고 푸르름을 되찾았다.
청평 나들이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위적인 문화적 장벽을 걷어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장벽이 걷히고나면 모든 사람은 서로 향유할 수 있는 공통적인 화젯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미국 사회와 다르다. 그러나 가족의 소중함이라든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지등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판단기준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 문화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청평 호수를 다시 찾곤 했다.<번역=이종수 기자>번역=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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