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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97 리더십 21­역대 대선 표 흐름

입력
1997.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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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때부터 표의 동서분할 현상/한때 여촌야도도 지역감정 심화로 점차 사라져역대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표 흐름은 일정한 경향을 보였다. 직선으로 치러진 대선은 2∼7대, 13∼14대 등 모두 8회이며 여촌야도, 표의 동서현상 등 정치적 경향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5대부터이다.

그 이전인 2, 3, 4대 선거는 이승만 후보가 70% 이상의 압도적 표차로 승리, 특징적 흐름이 없었다. 2대(52년)때는 이 전대통령이 조봉암·이시영 후보와 대결, 74.6%를 얻어 승리했다.

3대(56년)때는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는 바람에 이 전대통령이 70.0%를 얻어 30.3%에 그친 조봉암후보를 눌렀다.

4대에서는 조병옥 후보가 선거 도중 사망, 이 전대통령이 유효투표의 100%를 독식, 당선됐다.

이후 5∼7대 선거에서는 여촌야도 현상이 두드러졌다. 5대(63년)때 박정희 후보는 46.6%로 45.1%의 윤보선 후보에 15만6,000표차로 신승, 이번 15대 대선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박 전대통령은 6대(67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와 재대결, 51.5% 대 40.9%로 116만 표차의 낙승을 거두었다. 7대(71년)때는 박 전대통령이 53.2%를 얻어 45.3%의 김대중 후보에 이겼으며 표 차이는 94만7,000표였다.

5∼7대때만해도 「고무신 표」 「막걸리 표」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매표행위가 노골적이었으며 특히 여권의 관권·금권은 농촌지역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반면 도시지역은 야당성향을 나타내 여촌야도라는 정치조어가 탄생했다.

특히 7대때부터는 표의 동서현상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호남에서는 58% 대 33%로 김대중 후보가, 영남에서는 71% 대 23%로 박 전대통령이 우세해 지역주의가 서서히 노골화했다. 다만 지금과 다른 점은 당시 표의 응집력은 호남 보다는 영남에서 더 뚜렷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대통령직선은 13대(87년)에 가서야 가능해졌다.

7대때부터 고개를 든 지역감정은 13대때는 기승을 부렸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 등 이른바 1노3김이 출전한 13대 대선에서는 「황색바람」 「녹색바람」 등 지역바람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69.6%)·경북(64.8%)에서 압도적 표를 얻었고 김영삼 후보는 부산(56%)·경남(51.3%)에서, 김대중 후보는 전남(87.9%)·전북(80.9%)에서 몰표를 얻었다. 지역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여촌야도는 사라져버렸다.

예를 들어 노태우 후보가 경기·인천에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1위를 기록했으며 서울에서도 32.6%를 얻은 1위 김대중 후보에 2% 차이로 2위를 차지, 여촌야도 가설을 무너뜨렸다.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자구도로 치러진 14대 대선에서는 지역주의가 극에 달했고 「DJ 대 반DJ」의 구도, 이와 맞물린 사표방지심리가 새롭게 생겼다.

당초 정후보가 대구·경북에서 상당한 세를 형성했으나 막판에 이들 표가 김영삼 후보에게 급속히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졌을 때 대구·경북 등 영남지역에서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선거전략이 구사되기도 했다.<이영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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