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추위에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한파에 떨며 국민들은 오늘 제15대 대통령선거의 투표장으로 간다. 국가 부도위기의 국난속에 한표 한표에 구국의 기원을 담아 투표함에 넣으러 간다. 투표함 속에 겨레의 구원이 있다.우리 헌정사상 이렇게 어둡고 참담한 선거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런 난국에 이런 어려운 선택의 난문이 주어진 적도 없다. 그러나 어차피 풀어야 할 출제다. 유권자들은 모두 수험생이다.
하필이면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IMF 파동이냐고 억울해 하는가. 아니다. 당연한 귀결이요 다행한 계기다. 한 대통령의 실정은 그 종말이 어떤 재앙인가를 실증해 주었고 대통령의 선출은 얼마나 큰 대사인가를 경각시켜 주었다. 국치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그 불행은 어쩌면 오히려 국운이다. 오늘 선거는 불운을 행운으로 바꾸는 성사다.
참으로 회한이 아리다. 지금까지 국민들은 아무렇게나 선출만 해놓으면 아무나 대통령이 되는 줄 알았다. 투표를 투전하듯 했다. 이제 비로소 각성하게 되었다. 그 오도의 표들이 오늘 투표함에 모인다.
이른바 문민정부의 첫 대통령이 실패한 것은 너무나 아프다. 무엇을 위한 민주화 투쟁이었던가. 민주주의는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의 지도이념일 수 있을 것인가. 그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을 만회할 대통령을 오늘 우리는 뽑아야 한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실패는 곧 국민의 실패다. 실패한 대통령을 뽑은 실패한 국민을 천운은 두번 뒤돌아보지 않는다. 대통령을 잘못 선택한 국민의 맹목을 역사는 두번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대사는 종말이 불행한 대통령들의 박물관이다. 거기 견본이 다 들어 있다. 불행하지 않을 대통령을 선출하는 법을 배우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우리는 이제야 지혜있는 유권자가 되었다.
국민소득 1만달러가 되기까지의 우리 사회는 이른바 개발독재형의 구조로 족할 수 있었다. 이제 각목식으로 쌓아올린 그 구조가 1만달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무너져 내렸다. 경제 골조의 개편만으로는 안된다. 문화적 바탕을 개조해야 한다.
바람이 불고 있다. 큰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 선거는 한국적 문화대혁명의 신호다. 중국의 문화혁명과는 본질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때의 사구이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부터 우리도 타파해야 한다.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의식을 혁신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적 문화혁명이다. 오늘 그 혁명의 지도자를 선택한다.
21세기를 맞는 대통령을 뽑는다고 한다. 건국이래 지난 50년동안 걸어온 행보로는 앞으로의 50년을 더 걸을 수 없다. 새로운 세기의 입구에서 나라의 새로운 보법을 지도할 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우리의 새 대통령이다.
21세기는 우리의 세기라고 한다. 한국이 세계 열강으로 웅비할 경이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시련은 항상 행운의 전조다. 지금 이 세기말의 난국은 민족사의 계시다. 우리 겨레의 진운을 시험하는 것이다. 나라의 대행운을 감당할 국력을 미리 단련하는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국가 개조의 호기를 맞은 우리 국민은 참으로 복되다. 오늘은 그 축복의 축제일이다.
잘못 선택한 대통령의 임기 5년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러나 잘 선택한 대통령이 이끌어갈 창창한 역사의 단초앞에 서고 보니 새로운 힘이 솟는다. 투표함은 지난날의 실의를 쓰레기처럼 모으는 상자가 아니다. 그 속에 오늘 우리는 다가올 민족의 영광을 한잎 한잎 꽃잎처럼 담는다.
오늘은 국민 각자가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는 날이다. 그런 책임감으로 투표장에 가자. 뽑아놓고 그냥 지켜만 볼 대통령이 아니라 뽑고 나서 끝까지 밀어줄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국민 모두가 대통령의 분신일 때 오늘 뽑은 대통령은 절대로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번 선거는 승자없는 선거라야 할 것이다. 누구도 이겼다고 기뻐할 수 없는 선거다. 선택은 하나이지만 한 사람의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전후보를 공동으로 뽑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나라가 위급하다.
지금은 전시다. 국민들은 6·25전쟁 이후 또 한번 정신적 폐허 앞에 섰다. 그러나 오늘로 우리는 기어코 다시 일어설 것이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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