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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선불교 차풍 옛절터에 아스라이…(차따라: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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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선불교 차풍 옛절터에 아스라이…(차따라:32)

입력
1997.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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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승 무염국사 ‘다선불이’ 전통이어 845년 선문 개창/최치원이 쓴 비문엔 차와 향 뜻하는 ‘명발’글자 승가의 차전통 면면히달마(?∼528)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불교는 8대조사 마조도일(707∼786), 9대조사 마곡보철(생몰미상)에 이어 10대는 동쪽으로 건너 와 신라 무염국사(801∼888)에게 맥이 전해진다. 무염은 중국의 선맥뿐 아니라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다선불이」의 다풍도 이어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서기 845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받아 귀국한 무염은 지금 충남 보령 만수산 기슭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선문을 연다. 지금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최치원(857∼?)이 쓴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나 동국대학교에 소장된 김입지(무염국사와 동시대의 신라의 학자)가 쓴 「성주사사적기」에는 차인들이 목마르게 찾았던 「차」자가 나온다.

차는 향과 더불어 스님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물이었다. 무염의 일생이 기록된 「낭혜화상탑비」에는 차와 향을 뜻하는 「명발」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당시 문성왕(839∼857)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이었던 헌안왕(857∼860)과 동생 김양(808∼857)을 중국에서 갓 귀국한 무염에게 보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차와 향」을 올리도록 했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성주사사적기에도 성주사 낙성법회가 성대히 열릴 때 차와 향을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올렸다는 「다향수」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비문에는 당시 성주산문을 모르면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를 따랐던 문도만 2,000여명이었다. 무염은 47대 문성왕으로 부터 차와 향을 공양 받으며 48대 경문왕(861∼875)과 49대 헌강왕(875∼886)때는 국사의 지위에 오른다. 헌강왕을 이은 50대 정강왕(886∼887), 51대 진성여왕(887∼897)에 이르기까지 신라 5대 왕으로 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했다.

「강남의 풍치는 승가에 있는데/ 바위에서 마시는 죽리차, 그 청향을 듣는다. 탈속한 스님이면 이 운치를 더 깊이 아련마는/ 차마시고 향에 젖을수록 옷깃에 차향만 가득하네」(강남풍치설승가 석상청향죽리다 무염명승지경호 향연다량만가사)

중국고승전에 있는 무염의 스승인 마곡의 시이다. 이 시에 나오는 「무염명승」이라는 구절은 세상을 초탈한, 속세를 버린 탈속한 스님으로 도가 높은 고승을 지칭한 것이나 일각에서는 마곡이 제자인 무염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남겼다는 해석도 있다.

마곡은 누구인가. 단순한 마실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차를 선에 접목시켜 선의 화두로 끌어 들인 8대 조사 마조도일의 제자이다. 마조의 문하에는 걸출한 차의 달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불전이나 사원의 각종 의식에 차를 올리게 하면서 사원 차례의 바탕이 된 「백장청규」를 남긴 백장 회해(749∼814), 또 「차한잔 마시고 가게」(끽다거)라는 유명한 공안의 주인공인 조주(778∼897) 등 무염은 당대의 걸출한 선배 조사들의 차풍을 고스란히 신라에 가져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중국 당나라 서울 로양(낙양) 불광사에서 마조의 법손인 여만이 무염을 처음 본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다. 뒷날 중국이 선을 찾는다면 동이에게 묻게 될 것이다』고 했다. 후난(호남) 형산 마곡사에서 스승인 마곡은 무염에게 법을 인가한다. 이 자리서 마곡은 『대법이 동으로 흐른다(동류지설)』는 6조 혜능의 예언과 함께 『지혜의 물이 바다 건너 구석진 곳까지 크게 뒤덮도록 한다면 덕이 얕지 않을 것이다』던 스승의 말씀을 무염에게 전했다. 마곡은 또 『이제 법을 인가할테니 신라에 가서 공경히 하라. 나는 지금 마조의 대아이지만 뒷날에는 해동의 대부가 될 것이니 스승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고 했다. 중국의 고승마다 무염을 동쪽땅에 선종의 법맥을 뿌리 내릴 걸출한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대천해수욕장 들머리에서 부여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간다. 얼마안가 경사가 심한 산길로 접어든다. 산을 뚫은 터널을 지나면 보령군 성주면. 성주사터란 큼직한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해 들어가면 만수산(433m) 북쪽과 성주산(680m) 서남쪽 자락이 만나는 넓직한 분지가 성주사터다. 여기 저기 주춧돌만 어지럽게 나딩굴고 있는 2만여평 성주사터는 산골의 매운 바람만 싸늘하다. 50칸에 달하는 불전, 800여칸의 행랑, 창고만 50칸이었다는 대사찰은 임진왜란때 불탄 후 폐허로 남아 있다.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탑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과 석탑 3기, 돌미륵상이 을씨년스럽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마신 것으로 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은 밥으로는 나의 굶주림을 구하지 못한다. 어찌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하느냐』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무염국사의 법문이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향기 위주로 차를 마실땐 입이 좁은 찻잔이 적당하고 찻빛 살리려면 입이 넓어야 제격

같은 사람이 찻잔을 만들어도 찻잔마다 모양이 조금은 다르다. 그 조금씩 다른 찻잔의 모양과 빛깔을 염두에 두고 차를 마신다면 다도에 입문을 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여름에는 바깥 공기와 닿는 면적이 넓은 모양의 잔이 좋고 겨울에는 바깥 공기가 닿는 면적이 좁은 잔이 좋다. 즉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가 그대로 적용된다.

찻잔은 잡기 편해야 하고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찻빛을 제대로 살려주고 잡았을 때 표면에서 느껴지는 맛이 있어야 한다. 정갈한 것은 정갈한 대로, 거친 것은 거친 대로, 나름대로의 멋을 지녀야 한다. 이는 개인적인 취향이므로 형태에 따라 찻잔을 구분해 보도록 한다.

막연히 입이 넓은 잔, 좁은 잔이라고 말하지만 옛날에는 찻잔을 대체로 종 구 완의 형태로 구분하였다. 종은 말 그대로 종처럼 생긴 형태로 오목한 맛이 사랑스럽고, 구는 이른바 통찻잔으로 통처럼 생겨서 남성적인 맛이 난다. 완은 찻종을 납작하게 눌러 놓은 형태의 찻잔인데 잎차보다는 가루차를 마실 때 많이 쓰인다. 같은 차라도 담는 찻잔에 따라 맛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차완이 비교적 맑은 색깔로 찻빛이 도는데 반해 종과 구는 비교적 어두운 빛깔이다. 향기를 위주로 마시는 찻잔은 종이나 구처럼 깊은 찻잔이 좋고, 색의 어울림이 강조되는 가루차는 완이 적당하다.

차를 마신 다음 찻잔과 차관을 잘 관리하는 것은 차맛을 즐기는 비결이다. 흔히 뜨거운 물로 씻어 내기만 하는데 찬 물로 한번 더 헹구면 좋다. 「다신전」에는 반드시 차를 마신 뒤 찬 물로 차구를 헹구어 서늘하고 차게 보관하여야 한다고 했다. 행여 차찌꺼기와 차관에 남은 더운 기운에 차관이 부패하여 맛을 해칠 지 모르기 때문이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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