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특명으로 전 3권 5만4,000자 9일만에 집필·제출/‘불세출의 기행문학’ 탈고후 수차제작 등 나랏일 헌신/무오사화로 함경도 유배·갑자사화때 처형 “기구한 말년”광닝(광녕)과 랴오양(요양)에서 중국측 고관들의 환대를 받은 최부 일행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488년 6월4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목사 윤천이 보낸 군관의 영접을 받고 의주성에 들어온 것은 한밤 중인 삼경이었다. 사지에서 벗어나 고국땅을 밟게 된 최부 일행의 감회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최부는 한없는 감상 대신 국경도시 의주의 초라함을 한탄하는 공분으로 표해록의 끝을 맺는다.
<자정 무렵 의주성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의주성은 정말 한족과 여진족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성은 규모가 작은데다가 퇴잔하였으며 성안의 마을도 쇠락하였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었다>자정>
의주에서 서울까지 10일 동안 하루 100여리의 행보로 서울에 도착, 남대문밖 청파역에 머물렀다. 도착 당일 성종은 전격적으로 표류일기 즉 「표해록」을 제출하라고 명했다. 5년전 1483년 제주에서 표류해 명나라 양저우(양주)에서 베이징을 거쳐 귀국한 제주 정의현감 이섬의 표류기를 홍문관 직제학 김종직에게 작성케 한 전례가 있었다. 성종은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파란만장한 표류담과 함께 중국의 실상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예법에 따르면 최부는 즉시 전라도 나주 본가로 돌아가 복상해야 했다. 그러나 국왕의 특명으로 이례적으로 서울에 머물면서 5만4,000여자에 달하는 「표해록」 전 3권을 집필, 불과 9일만인 6월22일 제출했다.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이러한 작업이 가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부는 제주를 떠나면서 표류를 시작하게 되자 기록을 시작했다. 어쩌면 산산이 흔적도 없이 바다 속으로 사라질 종이뭉치지만 그래도 그는 기록을 포기하지 않았다. 투철한 공인의식과 역사의식이 불세출의 기행문학인 「표해록」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단기간에 그 방대한 기록을 최부 혼자 완벽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배리인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등과 함께 분담해 집필했다. 최부는 일찍이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편찬사업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효율적인 팀 작업을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성종의 「표해록」 독후감을 이렇게 전한다. 『망망한 만리바다를 표류해 무사히 살아왔으니 참으로 처참하구나(표박만리 무양생환 가위처창)』 만약 이때 최부가 상제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포상과 승진이 있었을 것이다. 5년전의 이섬은 선략장군(종 4품)에서 어회장군(정 3품 당하관)으로 특진했다. 최부의 경우라면 그 이상의 특진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부는 제수용으로 쌀과 무명 50필을 하사받고 6월22일 나주로 떠났다.
최부가 서울을 떠난 지 이틀 후인 6월24일 성종은 전라감사에게 최부의 지도에 따라 수차를 만들어보내라고 긴급명령을 내렸다. 최부가 수차를 처음 본 것은 저장(절강)성. 그뒤 산둥(산동)성 징하이(정해)현을 지나면서 수차를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해 호송군관 푸룽(전영)에게 제작법을 물었다.
그러나 푸룽도 기술자는 아니어서 아마추어끼리 진지한 토의 끝에 그런대로 수차의 구조모델을 만들어낸 것 같다. 표해록은 이렇게 즉각 국정에 활용된 것이다. 수차 제조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40일 후인 8월4일 최부의 지도로 만든 수차 모델이 중앙에 전달됐다. 최부는 복상의 관례를 깨고 국가를 위해 표해록을 집필하고 또 수차 제조까지 해낸 것이다.
당시 조선의 농업에서는 수차의 이용이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부가 제작한 수차는 어떤 모델일까. 명나라 말기인 1637년 숭잉싱(송응성)이 펴낸 유명한 과학기술서 「천공개물」을 보면 수력을 이용하는 통차, 소 힘으로 움직이는 우차, 인력용인 답차와 발차 등이 나온다. 최부가 만든 수차는 구조로 미뤄 발차인 것으로 풀이된다. 뒷날 1496년(연산군 2년) 충청도에 가뭄이 들자 최부는 현지로 파견돼 수차 제조를 다시 지도한다.
최부는 귀국 다음 해인 1489년 또 모친상을 당해 1491년 말에야 겨우 탈상했으나 성종의 총애와 비호에도 불국하고 관계 재진출은 순탄하지 않았다. 1491년 11월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됐으나 대간들의 맹렬한 반대로 다음해 1월 결국 사임하고 말았다. 국왕과 육조와 홍문관은 비호하고 양사(사간원과 사헌부)는 탄핵했다. 탄핵 이유는 상제의 몸으로 중국에서 시를 지은 것, 귀국 후 즉시 분상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표해록을 저술한 것 등이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고 표해록을 읽고 감동할 줄 모르는 형식주의 관료들의 한심한 작태에 희생된 것이다. 최부는 거치른 관계의 바다에서 또 다시 표류할 뻔했다. 벼슬은 세자시강원문학(정 5품) 홍문관 부응교(종 4품), 사간원 사간 등 조금씩 올라갔으나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잃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스승 김종직, 그리고 성종대왕, 김굉필 등과 차례로 사별했다.
최부의 만년은 더욱 비참했다. 세상은 태평성대에서 질풍노도의 연산군 시대로 들어간 것이다. 1498년 이미 죽은 김종직을 탄핵하는 이른바 무오사화가 일어나 최부는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돼 7년간 고생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됐다. 51세의 비극적인 삶이었다. 1506년 중종반정 뒤에 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로 추증, 복권됐다. 승정원에 소장된 표해록 원본을 외손자 유희춘이 찾아내 1573년 전라감사 유홍이 간행,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최부와 표해록의 삶과 운명은 이토록 기구했다.<박태근 관동대 교수>박태근>
◎서양인이 본 표해록/과거 동아사의 생생한 창 열린 느낌/현실적 기록으로 명나라 연구 소중한 자료
최부의 표해록을 읽었을 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생생히 과거 동아사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창이 열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것으로 눈을 뜨는 경험을 했다. 그 시대는 조선과 중국이 번영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최부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찬란한 시기에 표해록을 썼다.
이 책이 주는 첫 인상은 저자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크나큰 곤경에 직면해서도 그는 용기를 잃지 않았고 자기 경험의 원칙을 모든 행동에서 고수했고 때로는 너무나 엄격하게 원칙을 좇아 중국인 호송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조선문화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에도 매우 박식함을 보였고 동아세계의 국가간 문화교류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는 수차가 어떻게 조선농부에게 이익을 가져올 지 그 제작방법을 기록할 때처럼 실질적이며 일상적인 것들을 관찰했다. 그는 중국인 눈에 조선을 대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학자와 관리로 평가받은 최부의 언행은 그래서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미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얻은 두 번째 인상은 중국의 면모를 인식한 것이었다. 최부는 그가 본 것을 현실적으로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것 대부분은 현재에도 명나라의 정치문화를 연구하는데 유용하다. 그는 남북의 문화적 차이, 즉 남방은 번창하고 문명적이고 북방은 가난하고 거친 시대상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는 또 북방보다 남방에 문자 해독력이 더 넓게 퍼졌음을 관찰했다. 예를 들면 중국인 관리들이 정식 신임장 없는 외국인에게 베푼 예의바른 대우처럼 행정의 방법과 실제에 대해 그가 경험한 바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렇게 구체적인 관찰로 중국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희귀하고도 가치있는 의식, 특히 관료들과 중국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다.<존 매스킬(전 컬럼비아대학 교수)>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