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부도 일보직전이라고 야단들입니다. 남의 빚을 얻어 쓴 개인이 그 빚을 기한 내에 갚지못하면 빚진 자의 집은 차압당하고 집안의 온갖 세간에는 빨간 딱지가 붙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하께서 지난 5년동안 다스리신 이 나라가 오늘 그런 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국가가 차압당하면 국민의 신세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정말 암담합니다. 달러값은 이제 2,000원선을 향해 치솟고 있고 종합주가지수는 400선이 무너진지 오래고 300선도 위태롭다는 헛소문도 차차 퍼지고 있습니다. 단단하기로 소문났던 고려증권이 부도처리되고, 예탁금 3,000억원으로 업계 4위를 자랑하던 동서증권도 영업이 정지되는 비운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증시의 회생은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내다 보입니다. 모두가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뿌리며 김영삼정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최근의 경제위기와 관련,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하시면서 『우리 경제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면서 무어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제하고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각하, 대국민 사과가 그동안 너무 여러차례 거듭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사과담화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첫번 하신 대국민 사과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이 잘 안됩니다마는 사과 뒤에는 반드시 어떤 비장한 결심과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법인데 각하께서는 다섯번이나 반복된 사과이긴 하지만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국민의 상한 마음을 잠시 어루만져 어떤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모면하려는 책략으로 매번 사과문을 발표하셨다고 밖에는 풀이가 안됩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고 하셨지만 책임이란 인정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 짐을 마땅히 져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간 여러번 사과를 하시면서 단 한번인들 그 책임 때문에 대통령직을 사임하실 생각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미안한 말씀이지만 각하께서는 「국가부도」라는 용어의 참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계시지는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문가들은 『정부, 금융기관, 국민이 서로 믿지 못하고 국제사회도 우리 정부와 금융기관을 신뢰하지 않아 위기가 증폭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각하의 정부는 단 한번도 국민 앞에 솔직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마저도 속이려 들었다는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어서 문제가 전혀 풀리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치권 일각에서 「IMF 재협상」을 하겠다고 했을 때 각하께서는 왜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 발언이 IMF를 상대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착각하셨던 것은 아니겠지요.
앞으로 대통령 선거일이 3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세 후보 중에 어느 한 후보가 당선이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 당선자가 김씨가 될지 이씨가 될지 저희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혹시 누가 될 것이라고 짐작이라도 하시는지요. 어느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여기시는지 궁금합니다. 누굴 하나 점찍어 말씀하시면 혹시 그 후보의 득표에 불이익을 줄 것 같아 아예 말씀을 안하시는 건지요.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기야 어느 누구도 「여당」이라고 하기를 꺼려하게 되었으니 「여당」없는 정치판이 건강할 리가 만무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오는 18일 투표를 하고나면 틀림없이 이씨 아니면 김씨가 대통령당선자로 등장하게 되겠습니다마는 내년 2월25일에 과연 대통령 취임식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무슨 정치를 어떻게 하셨기에 오늘 5,000년 역사의 대한민국이 이 꼴이 되었습니까.
누군가가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을 지고 배를 가르는 용기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남은 날들을 각하께서는 무슨 낯으로 사시렵니까.<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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