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경영 불투명성이 오늘날 경제위기 근원/경제기초 다지기위해선 투명성 높이는 길뿐금융실명제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집단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필자는 본란에 「금융실명제를 농락하는 자들」이라는 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의 골격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국제금융기구(IMF)의 말 한마디에 그 집단 모두가 머쓱해진 마당에 새삼스레 금융실명제의 변론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제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한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현 난국의 일시적 모면이 아닌 구조적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금융실명제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필자의 적극적인 의견을 전하고자 한다.
정부가 거듭 밝힌 대로 거시지표가 괜찮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원인은 무엇인가? 흔히들 한보사태나 기아사태를 들먹이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사태」일 뿐 원인이 아니다. 그것들을 포함하여 우리 경제가 오늘의 사태에까지 처하게 된 것은 한마디로 그 미시적 기초의 부실 때문이다. 결코 낮지 않은 성장률을 기록해 왔다고는 하나 이미 오래 전부터 수출의 성장기여율이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올해들어 경상수지 적자폭이 감소되고 있다고는 하나 교역조건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기업투자도 회복되었지만 양적인 확대일 뿐 부실 투성이다. 그러니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 모두가 부실채권에 허덕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현난국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외환위기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급전을 차입하여 장기대출하고, 대출을 받은 기업은 「재벌 놀음」과 「재테크 놀음」에 몰두한 데에 기인한다. 무분별한 해외여행과 과소비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온통 뒤집어쓰거나 제일 먼저 추궁당할 만큼 주도적인 요인은 아니다.
이렇듯 「좋은」 거시경제의 미시적 기초가 부실한 핵심적 원인이 경제행위의 불투명성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났는데도 감추고 큰소리까지 친 정부의 행위가 늦게서야 블랙코미디로 판명된 것은 정책의 불투명성 때문이요, 자기자본의 몇십배에 달하는 금융을 독식하여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빌린 재벌이 밖으로 살찌면서 안으로는 곪아터져 나가고 있는 것은 경영의 불투명성이 낳은 필연적 결과이다. 그 엄청난 돈으로 실제 무얼했는지 결코 투명하지가 않다. 이 나라 경제에 투명성이 얼마나 결여되어 있었으면 사채업자들이 급전 외채장사에 그렇게나 많이 뛰어들어 외환위기 경쟁을 할 수 있었던가. 최근 몇 년간 종금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될 수 있었던 사정 역시 불투명하니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땀흘려 번 돈은 결코 과소비에 쓰여지지 않는다는 상식에 기초할 때 실제 과소비하는 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경제행위의 불투명성이 문제의 근원인 이상 우리 경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책수단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다시 병영국가로 돌아가지 않는 한(사실 병영국가와 투명성은 관계가 없지만)금융실명제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는 비단 금융거래의 투명성만이 아니라 돈흐름의 측면에서 정부정책과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경제정의라는 거창하지만 추상적인 단어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종합과세를 통하여 조세형평을 달성하는데에 기여하며,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불신과 마찰을 해소함으로써 모든 거시경제의 미시적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한다. 투명해야 합리적인 경제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고, 이에 기초한 게임룰이 형성될 수 있으며 경제의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할 때만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 제고될 수 있으며 신뢰성 있는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
현재의 경제난국과 관련하여 정치권에서 거론되고 있는 금융실명제의 폐지 및 보완(한나라당), 당분간 유보(국민회의), 또는 무기명 장기채의 발행을 통한 보완(국민신당) 등은 현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봉적으로 모면하고 보자는 정치논리에 불과하다. 정치논리에 의한 금융실명제의 사실상의 실종이 용납되어서는 우리 경제의 기초가 다져질 수 없다. 물론 보완은 필요하지만 그 방향은 후퇴가 아니라 반드시 강화라야 한다. 따라서 현재 입법예고된 재경원공고(1997―46호)는 철회되어야 마땅하며, 금융실명제 보완이 선거에 휩쓸려 정략적으로 다루어져서도 안된다. 금융실명제는 「정치놀음」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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