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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은 대통령」/이병일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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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은 대통령」/이병일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7.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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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민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는 김영삼 대통령은 「발가벗은 임금님」 그대로 였다. 그것도 홀로 서 있는 임금님이었다. 마치 TV의 「동물의 세계」란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아프리카 초원의 붉게 물든 석양 하늘을 배경으로 외로이 서 있는 지평선상의 한그루 나무같았다.김대통령은 사과하고 경제난 극복의 의지를 다짐했지만 어떤 기대감보다는 고독함과 처절함 만이 진하게 전해왔다. 국민들의 지지는 물론 국민들의 거센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 및 지원해 줄 세력이나 사람이 대부분 떠나가 「발가벗은 신세」가 됐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아프리카 초원의 나무는 운치나 있다. 또 동물들에게 갖가지 은총를 베푼다. 동물들이 더위를 피하게 해주고 동물들이 몸을 비벼 기생충을 떼어내도록 도와도 준다. 주위에 파릇파릇 풀이라도 돋아나면 모여드는 동물들의 숫자는 늘어난다.

김대통령도 취임초 개혁을 부르짖으며 밀어붙이듯 일할 때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90%란 국민들의 지지도가 말해 주듯 응원하는 국민들의 따뜻한 시선이 항상 그를 감쌌다. 국민들은 나무 주위에 자란 풀처럼 대통령을 의지하고 문민개혁이란 커다란 꽃을 피워 주기를 기대했었다.

이제는 모두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인기도는 말조차 꺼내기 어렵게 됐다. 국민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 알몸이 돼버린 대통령의 황혼을 분노에 차 바라볼 뿐이다. 그의 주위는 동물들이 신선한 풀을 찾아 떠나가 버린 텅빈 아프리카의 초원같다.

이러한 초원엔 뒤에 처진 사자나 들개 표범 치타 등이 없는 먹이를 찾아 핏발선 눈을 번득이기 마련이다.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15대 대통령선거가 좋은 예다. 하이에나 대머리독수리 황새는 굶주려 죽은 동물의 시체나마 서로 먹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한국경제가 파탄지경에 빠지자 이 틈새에서 국익을 챙기려는 선진국들은 이들과 조금도 다름없다.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나라살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근본 원인은 문민정부의 오만함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들은 오만에 찼던 지난 1월7일의 연두기자회견을 잊지 못한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문민정부가 국민들의 눈밖에 나기 시작한 상징적인 회견이었다. 문민정권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권이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 그로부터 1년도 안된 사이에 나라살림은 거덜이 났다.

문민정권이 개혁의 상징처럼 떠받들고 있는 「금융실명제」를 흔히 「금융실명제」라고 비꼰다. 이는 경제정책에서 앞을 바라보는 안목이 없었다는 지적과 함께 독선 속에 안주하다 보니 스스로가 「발가벗은 대통령」이 되어가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문민정부의 사과담화는 여러번 들어 이젠 감흥도 없다. 겸허하게 고개 숙인다고 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와서 사죄를 한들 이를 믿고 기대를 갖는 국민들도 없다. 「발가벗은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도 「풀」이라며 사랑했던 백성(구약성서 이사야서 40장 6∼8절), 즉 민초들은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모여든다. 커다란 나무라 할 통치자가 잎으로 퇴비를 만들어 주고 햇빛을 적당히 조절해 주면 풀은 건강하게 자란다. 그러나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즉 발가벗은 나무는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

개혁으로 시작한 문민정권은 나라경제를 망치고 국민들앞에 사과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됐다. 문민정권의 이같은 실패는 국민들은 물론 현재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맹렬히 뛰고 있는 후보자들에게 좋은 약이 된다. 국민들은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나라가 이처럼 된다는 교훈을 이번 선거에서 살려야 한다. 대통령후보자들도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만함 속에 사는 대통령은 「발가벗은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곰곰이 되씹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유시유종이라지만 그 끝이 「발가벗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본인은 물론 국민들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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