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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믿을건 서민들/김우식 연세대 교수·화공학(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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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믿을건 서민들/김우식 연세대 교수·화공학(아침을 열며)

입력
1997.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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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던 호텔의 현관에서 일단의 외국인들과 맞닥뜨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동안 기둥뿌리 빠지는 줄도 모르고 허세 속에서 거들먹대며 살아오다가 갑자기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진 참담한 몰골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한마디로 국가가 부도나게 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상 최대라고 하는 550억달러의 빚을 얻어다 쓰기로 하고도 위기를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비통한 심정을 넘어 울화가 치민다. 「경제 국치일」이니 「경제신탁통치」니 하는 치욕스런 말들이 나오고, 갑자기 나타난 「캉드쉬」란 사람이 우리 정부를 발아래 깔고 뭉개는 참담한 상황이 됐다.

더욱 분통 터지는 것은 돈을 빌려주면서 관례에도 없는 대통령과 국회의장 게다가 아직 될지 안될지도 모를 대통령 후보들의 서명까지 요구한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마치 항복문서에 조인하듯 줄줄이 서명을 했다.

국가간의 냉혹한 무한경쟁의 파고가 실감나는 장면이었고 「정치 우방은 있어도 경제 우방은 없다」는 국제사회의 불문율이 새삼 폐부를 찔렀다.

결국은 금고가 거덜난 사실도 모르면서 막연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고 들떠 있던 내 탓이고 우리 탓이다. 그런데도 생각할수록 속이 상하는 것은 도대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큰 소리 꽝꽝 치던 대통령을 비롯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일구어온 나라인데 하루 아침에 거덜내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360억달러라고 큰소리 칠때 사실은 70억달러밖에 없었다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인가. 엊그제까지 염려없다고 떠든 그 똑똑한 경제통들, 그들은 이제 무슨 말로 국민앞에 사죄할 것인가. 하기야 문민정부 5년동안 경제부총리가 7명이나 바뀌었다니 더 할 말도 없다.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갈 실무 책임자를 7번씩이나 바꿔댔으니 업무파악은 고사하고 인수인계나 제대로 되었겠나.

참으로 심각한 것은 이제 은행도 정부도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가 갑자기 불어닥친 세계화의 광풍에 눈 멀고 귀 멀고 오직 입만 살아서 제각각 무책임하게 떠들어댔다는 사실이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자원봉사로 국민훈장을 받은 가수 인순이씨가 『그래도 우리는 5,000년 역사가 있는 민족인데요. 잘 이겨낼 거예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평소 같으면 흘려 듣고 말 내용이었지만 이 지경이 되고 나니 『결국 이 나라를 책임질 사람은 힘없는 서민들이구나』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잘 이겨낼 것이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신발끈을 조여매고 부지런히 달려나가야 한다.

여기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책임질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자기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수행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국가위기를 초래한 경우라면 자기의 몸을 던질 각오도 해야 한다. 책임지는 풍토가 이룩될 때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우리가 바라는 사회이다. 이제 빚을 갚고 힘차게 일어서기 위해서는 의식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위의 작은 것부터 즉시 실천하자. 우선 원료를 전량 수입해다 쓰는 커피 한 잔부터 줄이자. 기름 한 방울 나지않는 나라에서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가득 메우는 한심한 작태부터 개선하자. 각 가정에서 기름이 타 없어진다는 생각으로 전등 하나부터 끄자. 이제 그럴 수도 없겠지만 돈자루를 배에 두르고 곰쓸개나 뱀을 찾아 동남아에 나가 거들먹거리는 추태도 중단하자. 이 기회에 관혼상제의 허례허식과 사치를 떨치자.

물론 이렇게 땀과 눈물로 이뤄놓아 보았자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관료와 정치인들이 한순간에 거덜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마지막 남은 희망은 이리 저리 채이며 살아온 국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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