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창덕궁·종묘·석굴암·대장경/이땅의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려온 선·색 그리고 형이 인류의 선·색·형이된다문화유산은 시간의 거울이다.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우리 산하의 구릉과 시내, 우리만이 간직해 온 그 곡선처럼 우리의 문화유산은 시간의 마모를 유연하게 견뎌낸다. 한국의 문화유산이 단순한 시간의 퇴적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선 색 형은 한반도의 지역적 경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움은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세계의 거울이 된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제도가 있기 이전부터 그러했지만, 잇달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는 이제 인류의 선과 색과 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다른 세계문화유산과 뚜렷이 구별되는 우리만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이 땅,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가장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선이다. 우리의 선은 직선이라기보다 곡선이다. 그것도 급한 굽이가 아니라 느긋하게 돌아가는 부드러운 선이다. 둥그스럼한 얼굴의 부드러운 이목구비의 사람들, 그들도 그 속에 곡선으로 살아가면서 정겹게 어우러진다.
지난 4일 상오 9시 이탈리아 나폴리.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가 열린 「플라자 렐(나폴리 왕궁)」. 100명의 위원국 대표가 참석한 총회는 25개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한 46건의 문화재를 심의하고 있었다. 자료를 뿌리고 슬라이드를 상영하며 자국 문화재의 우수성과 가치를 설명하는 각국 대표들의 열변으로 회의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낮 12시45분 어느덧 한국 차례. 창덕궁과 수원화성은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께 총회 참석자 만장일치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총회에 참석했던 문화재관리국 김대현 사무관은 『자연(숲)과 어우러진 창덕궁 전경이 슬라이드 화면에 비치자 시끄럽던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지면서 「무언」의 감탄이 회의장을 압도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창덕궁은 건축과 조경의 조화,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건축물의 배치구조가 동아시아 궁궐건축의 백미로 인정돼 등록이 확정됐다. 창덕궁은 건물이 자연숲 속에 포근히 자리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된 완전한 건축의 표상으로 평가돼 왔다. 수원 화성은 성곽시설의 기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 구조로 되어있는 등 동·서양의 발단된 과학적 특징이 통합된 근대초기 군사건축물의 뛰어난 사례로 평가됐다.
이는 우리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의 이름으로 그리스의 아폴로신전(86년등록) 델피고고유적, 아테네 아크로폴리스(87년), 이탈리아 듀오모광장(87년), 중국의 만리장성과 진시황릉(87년), 일본의 호류지(법륭사·93년) 등과 어깨를 견주게 된 것을 의미한다.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빠진 IMF시대에 우리의 문화재만은 반만년 세월의 무게로 세계인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우수성이 세계인에 의해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5년 12월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팔만대장경 및 판고, 종묘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바 있다.
종묘를 보자. 거기에 바로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어우러짐의 미학」을 추구하는 우리 반만년 문화의 고요한 힘이 드러난다. 건물 배치, 지붕의 선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자연과의 합일에서 나온 일자형 건축물, 조선 왕조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정전은 영원성을 선과 선의 중첩과 반복으로 표현했다. 앞에서 보면 25간의 본 건물의 길고 곧은 선들이 보는 이의 시야를 압도한다. 문 입구에서 시선을 올리면 넓은 맞배지붕이 가득 들어찬다. 기단, 기둥, 지붕의 단순성은 벽이 보이지 않고 「기둥의 행렬」만 보이는 설정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육중한 기단과 무거운 지붕으로 구성된 외관은 그 강한 수평선으로 안정을 이룬다.
석굴암은 세계인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신앙과 돌이 하나 되어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의 극치를 이룬 석굴암. 39체의 불상을 체계적으로 봉안해 정토세계를 그대로 사바세계에 옮겨놓은 듯한 석굴암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사방이 점점 낮아지는 하늘 모습의 천장을 하고 있어 신라인의 우주관과 건축술이 결집된 걸작 중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무려 8만1,340장의 경판에 5,200만자의 글자들이 오·탈자 하나 없이 아로새겨진 팔만대장경,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보여주는 일자형 건축물인 종묘도 세계인의 박수를 받았다.
세계무대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할 문화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수려한 풍경과 함께 하회별신굿놀이 뱃놀이 등이 마을 행사로 전래되어 오는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122호), 조선조 읍성의 기본 뼈대를 잘 보존하고 있는 제주 성읍민속마을(중요민속자료 제 188호), 9동의 민속자료와 여러 개의 관아 및 마을의 공동공간이 잘 조화를 이루는 순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 등도 언제든지 세계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자랑이다. 또 포석정터를 비롯해 수많은 신라시대의 유적을 품고 있는 경주 남산 일원, 황룡사지 안압지 황남대총 등 수많은 고분과 불교유적들이 산재한 경주시 등도 언제든지 세계문화유산이 될 자격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민속마을이나 남산처럼 집단적인 문화유산이나 일본의 교토(경도)시 처럼 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적이 없어 앞으로 이 부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문화재관리국 김종혁 기획관은 이와 관련, 『문화유적의 체계적인 정비 및 관리와 함께 역사고도보존법 제정 등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재 사랑이다. 민족의 얼 그 자체인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야말로 무슨무슨 유산으로의 지정을 기뻐하고 말고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문화재 보존의 최첩경일 것이다.<서사봉 기자>서사봉>
◎세계문화유산이란/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공동의 문화재
「세계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한 인류공동의 문화재를 말한다. 각국이 위원회에 자국 문화재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록신청서를 제출하면 위원회 집행이사회에서 1차 심의·평가를 한 뒤 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에서 등록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기술·재정적 원조를 받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큰 효과는 한 나라의 문화재의 격을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으로 높일 수 있다는 데 있다.
현재 문화재에 대한 세계적 인증제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제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72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유산협약」 의거, 75년 출범했으며 97년 현재 112개국의 418개 문화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켰다. 우리나라는 88년 협약에 가입해 현재 5개의 세계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중국 19건, 일본 8건이며, 이탈리아가 26건으로 가장 많다.
대표적 세계문화유산으로는 이집트 누비아유적, 인도 아잔타동굴, 캄보디아앙코르유적, 멕시코 마야유적, 중국 돈황동굴 등을 꼽을 수 있다.<서사봉 기자>서사봉>
◎문화유산헌장
문화유산은 우리 겨레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문화의 자산이다.
유형의 문화재와 함께 무형의 문화재는 모두 민족문화의 정수이며 그 기반이다.
더욱이 우리의 문화유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재난을 견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을 알고 찾고 가꾸는 일은 곧 나라사랑의 근본이 되며 겨레사랑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온 국민은 유적과 그 주위 환경이 파괴·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은 한 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 줄 것을 다짐하면서 문화유산헌장을 제정한다.
1. 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1. 문화유산은 주위 환경과 함께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1. 문화유산은 그 가치를 재화로 따질 수 없는 것이므로 결코 파괴·도굴되거나 불법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
1.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은 가정 학교 사회교육을 통해 널리 일깨워져야 한다.
1. 모든 국민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이상은 정부가 8일 발표한 「문화유산헌장」의 전문이다)
◎이순재 종묘사무소장/“종묘는 왕조의 숨결과 혼이 살아있는곳”
이순재(60) 종묘사무소장은 『조선왕조의 사당인 종묘는 가장 엄숙하게, 그리고 가장 정결하게 보존해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종묘의 규모는 대지 5만여평에 연건평 1,200여평. 전각 24개 동이 들어서 있다. 조선왕조의 위패를 모신 정전은 길이가 80m로, 국내 고건축 건물 중 가장 크다.이 소장은 27명의 직원과 함께 종묘를 돌보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관리와 경비업무이다. 10명의 관리요원은 종묘제례(무형문화재 제56호)에 쓰이는 제기와 제복, 고건물의 보수와 관리를 담당한다. 특히 정전과 후손이 왕으로 추존한 덕종 등 9명의 위패를 모신 영녕전, 정문-정전-영녕전으로 이어지는 200m가량의 신로(제례시 신이 다니는 길)를 보수·관리하는 일이 업무의 핵심이다.
경비업무는 5명이 맡는데 하루 2,500여명에 이르는 일반관람객들로부터 정전과 영녕전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에 치중한다. 조선임금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지금도 왕조의 숨결과 혼이 살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비담당들은 이와 함께 야간경비를 돌며 돌출사고에 대비한다.
지난 4월 부임한 이 소장은 『정전 또는 영녕전 정문 문턱에 걸터 앉는 관람객이나 통제구역 안에까지 들어가 결혼사진을 찍는 신혼부부를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진다』며 『곧 종로구청과 함께 종묘경관을 해치는 주변에 대한 정화작업을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61년 설치된 종묘사무소(당시 직원 35명)의 올해 예산은 인건비를 제외하면 8,200만원에 불과하다.<서사봉 기자>서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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