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더 나은 새해를 꿈꾼다. 지난 한해가 좋았던 사람은 더 좋은 새해를, 고통스러웠던 사람은 고통이 모두 지나간 평안한 새해를 기대한다. 그래서 연말에는 조바심과 설렘이 있다. 묵은 해는 빨리 가라, 한해의 액들을 싸들고 가거라, 기쁜 새해가 오고 있다, 새해는 물론 지난 한 해보다 좋을 것이다….1997년 12월에는 꿈이 없다. 98년은 97년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온 나라를 짓누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가 두렵고, 내일이 두렵고, 내년은 더 두렵다. 새해가 이처럼 두려웠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런 희망없이, 공포로 숨죽이며 새해를 바라보는 암담한 세모가 또 있었던가.
실직과 부도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매일 줄을 잇고 있다. 9일자 신문에도 3건의 자살사건이 실려 있었다. 냉면과 떡국 재료를 생산하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백인기(47)씨는 최근 2,500만원을 부도내고 자살하면서 자신의 가족들을 너무 윽박지르지 말아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화물운송업체 간부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한 소진현(51)씨, 도금공장에서 실직한후 직업을 찾아 헤매던 지선용(38)씨는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지씨의 주머니에서는 경비원과 청소부를 구하는 회사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
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겨우 국가 부도를 면한 이른바 정축국치의 한파는 이런 식으로 국민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한평생 외화 한푼 써본 적이 없는 사람들, 혹시 동남아 관광 정도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들, 재경원이 뭐하는 곳인지 잘은 모르지만 공부 많이 한 머리좋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 우리나라는 세계에 큰 소리 칠만큼 부자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되고 있다.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 무능하고 오만했던 대통령과 경제관료들, 방만한 투자와 경영으로 파국을 부른 대기업들, 정경유착으로 경제질서를 망가트린 정치인들, 흥청망청 과소비로 국제경제를 좀먹은 벼락부자들은 사실 국가가 망하든 말든 사는데는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재수없이 감옥에라도 가게되지 않을까 라는 불안과 다소의 자책은 있겠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은 없는 사람들이다. 엄동설한에 직업을 잃고 생계에 쫓기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심정을 그들이 알기나 하겠는가.
내년 경제성장률이 3%에 머물 경우 실업률이 4∼5%에 이르러 80만명 내지 120만명이 실직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금년에 직업을 잃은 50만명을 합쳐서 200만명 가까운 실직자가 쏟아져 나오게 된다. 대량 실업사태로 인한 사회불안을 염려하는 소리는 그 자신이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실업자들의 고통 앞에서 무색하기만 하다.
지난 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를 자랑하던 한국 경제는 94년 수준으로 허무하게 주저 앉았다. 금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9,900달러, 내년에는 8,200달러 내지 8,900달러 선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경제연구소들은 전망하고 있다. 국민소득이 얼마냐로 다른 나라들을 얕잡아 보던 경박함을 부끄러워 하면서 우리는 다시 국민소득 1만달러 이하 나라로 되돌아 갔다.
대선후보들은 다투어 경제를 회생시키겠다고 큰 소리치면서 수백만의 일자리를 1, 2년안에 창출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 장밋빛 공약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그 짧은 기간에 그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고 따지는 사람조차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걱정이 국민의 가슴마다 꽉 차 있기 때문이다. IMF 한파로 선거열기는 급속하게 냉각됐고, 정치에 대한 냉소조차 얼어붙은 상태다.
국민명예협회장이란 직함을 쓰는 김규봉씨는 대통령, 전 경제부총리, 한은총재 등 「국치 5인」을 직무유기로 대검에 고발하면서 『대통령 등은 국민경제의 현실을 주의깊게 분석하여 유효적절한 대응책을 모색하고 경제위기에 대한 정확한 지표를 국민에게 공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만방자하고 독선적인 밀실행정으로 오늘의 난국을 초래했으므로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하고 문책해야 한다』고 고발장에서 주장했다.
어찌 직무유기뿐이겠는가. 수십만 수백만의 국민이 직업을 잃게 한 죄, 「청소부 구함」이란 쪽지를 품고 거리를 헤매다가 목숨을 끊게 한 죄, 국가부도에 티끌만큼도 책임이 없는 국민들을 희생당하게 한 죄를 어찌 직무유기로만 다스리겠는가.<편집위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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